전체 글 180

말과 글과 생각의 관계

교사나 교수들의 강의, 무슨 연구발표회 같은 자리에서 하는 강연을 들을 때마다 크게 느끼는 것은 저게 '말'이 아닌데, 저건 글인데 하는 것이다. 말이 아닌 글이요 문장을 입으로 말한다는 느낌이다. 말을 하면서 그 말이 말이 아니고 글에 가깝고 글이 되어버리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것은 매우 좋지 못한 현상이다. 말과 글, 이 두 가지에서 말할 것도 없이 말이 먼저 있는 것이고 글은 말을 따라가는 것이다. 말이 으뜸이고 뿌리다. 그런데 거꾸로 글을 따라 말을 하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말이 병들기 때문이다. 이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예사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 우리 말이 병들어 가고 있는 현실이다. 강의를 하든지 강연을 하든지, 말을 팔고 있는 사람은 대개..

줄서기라는 노동에 대해

회사 출근길은 지하철 1번 출구를 올라가면서 시작된다. 백화점 정문이 나오고 그 옆으로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요즘 유행하는 명품 구매대행 알바, 줄서기알바다. 오늘은 정문 옆 루이ㅇㅇ 쇼윈도부터 에르ㅇㅇ 쇼윈도를 넘어 백 미터는 됨직하다. 오늘은 어느 매장의 오픈런일까? 새벽을 지난 모습이어서 두툼한 겨울외투를 입고 발을 동동거린다. 침낭 속에 들어가 간이의자에 앉아 있기도 하고 자리를 깔고 누워 움직임이 없는 이들도 있다. 스마트폰을 보기도 하고 여럿이 있는 가운데 휴대용 컴퓨터를 보는 이도 있다. 2021년 여름쯤인가. 이 줄 서기는 눈에 띄었다. 그 이후로 수 십 차례 보았는데, 오늘은 천천히 바라보며 생각하게 된다. '이 줄 서기는 왜 내 눈을 끌고 바라보게 만드는 거지?' 지하철에서 줄을 ..

조각글쓰기 2022.04.09

도시 속 봄 말하기

"이게 꽃이야?" 하며 아쉬운 표정 짓지 말아 주세요. 대문호 괴테 옆에 서있는 나는 '산수유'입니다. 롯데월드타워&몰에서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어엿한 꽃이랍니다. 매년 이맘 때 우리 단지를 뒤덮는 벚꽃과 철쭉꽃은 탄성을 자아내지요. 오월이 되어 벚꽃과 철쭉꽃이 사라진다고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패랭이꽃, 노랑선씀바귀, 괭이밥, 지칭개, 봄망초, 억새풀과 띠가 아쉬움을 달래줄 거예요. 장미꽃이 필 무렵, 사촌뻘인 찔레꽃도 볼 수 있어요. 우리를 잡초라고 말하면 서글픕니다. 우리는 롯데월드타워&몰에 같이 살고 있으니, 한 번 찾아와 주면 어떨까요?

조각글쓰기 2022.04.08

<우리글 바로쓰기1> 요약

지난 천년 동안 우리 겨레는 끊임없이 남의 나라 말과 글에 우리 말글을 빼앗기며 살아왔고, 지금은 온통 남의 말글의 홍수 속에 떠밀려가고 있는 판이 되었다. 이오덕은 말이 아주 변질되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고, 한번 잘못 병들어 굳어진 말은 정치로도 바로잡지 못하고 혁명도 할 수 없다고, 그것으로 끝이다고 말한다. 이래서 오늘날 우리가 그 어떤 일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이 외국말과 외국말법에서 벗어나 우리말을 살리는 일이다. 밖에서 들어온 불순한 말을 먼저 글 속에서 가려내어 깨끗이 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밖에서 들어온 잡스런 말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첫째는 중국글자말이요, 둘째는 일본말이요, 셋째는 서양말이다. 우리가 몰아내어야 할 중국글자말은 우리 글자로 썼을 때나 입으로 말했을 때 그 ..

'줄거리 요약'의 예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데뷔작 를 읽고 줄거리를 200자 원고지 석 장으로 요약해보라. 그런 다음 그것을 솔제니친 스스로 요약한 것과 비교해 보라. 아래는 마지막 단락을 원본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 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절을 잘 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

'토씨'의 예

나(유시민 작가)는 우리말의 가장 큰 매력이 토씨에 있다고 생각한다. 토씨는 뜻을 압축해서 전하는 수단이며 문장에 감칠맛이 돌게 만드는 조미료이기도 하다. 다양한 토씨를 적절하고 정확하게 쓰는 아이는 언어 능력이 뛰어난 어른이 된다. 우리말에는 다양한 주격조사가 있다. '이''가'를 많이 쓰지만 맥락에 맞추어 '은''는'이나 '도'를 쓰기도 한다. 소개팅을 하고 온 어떤 여자한테 '절친'이 이렇게 물었다고 하자. '그 남자 어때?' 대답은 네 가지가 있다. '키도 커''키는 작아''키는 커''키도 작아'. 이 네 가지 대답 모두에서 토씨가 핵심 정보를 전달한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키도 커'는 이런 뜻이다. 그 남자 돈 많고 교양 있고 직장 좋고 심지어 키도 커. '키는 작아'는 괜찮지만..

못난 글을 피하는 법

못난 글은 다 비슷하지만 훌륭한 글은 저마다 이유가 다르다. 역설로 들리겠지만, 훌륭한 글을 쓰고 싶다면 훌륭하게 쓰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못난 글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 훌륭한 글을 쓰고 싶다면 잘못 쓴 글을 알아보는 감각을 키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잘못 쓴 글을 알아볼 수 있을까?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다. 텍스트를 소리내어 읽어보는 것이다. 만약, 입으로 소리내어 읽기 어렵다면, 귀에 듣기에 좋지 않다면, 뜻을 파악하기 어렵다면 잘못 쓴 글이다. 이런 글을 읽기 쉽고 듣기 좋고 뜻이 분명해지도록 고치면 좋은 글이 된다. 생각과 감정을 소리로 표현하면 말(입말)이 되고 문자로 표현하면 글(글말)이 된다. 말과 글 중에는 말이 먼저다. 말로 해서 좋아야 잘 쓴 글이다. ..

'거시기화법'의 예

다음은 '자동텐트'를 구입해 방에서 펴본 어느 네티즌이 블로그에 올린 사용 후기다. 이 글은 '거시기 화법'이라는 약점을 안고 있다. O 자동텐트를 이 가격에 구매하기는 어렵지요. 해당 가격에 만족스런 제품입니다. 일부 마무리 부분이 아쉽지만요. 일단 방에서 텐트를 쳐본 모습입니다. 약간 작은 듯하지만 나름 만족스럽지요. 텐트 안에서 보면 불빛이 새는 부분이 있어요. 박음질한 부분들인데. 이런 부분 때문에 비 올 때 제대로 방수가 될는지 의심스럽더라고요. 텐트 문을 묶어주는 끈이 하나가 짧아요. 이런저런 부분들이 아쉬운 점이 있지만 조금만 더 다듬어준다면 좋은 제품이 될 듯하네요. 그런 대로 뜻을 잘 전달하는 글이다. 그런데 이 짧은 글에 '부분'을 무려 다섯 번이나 썼다. 방송 뉴스나 시사 토론에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