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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와 콘텍스트

텍스트는 넓은 의미에서 '해석이 필요한 대상' 또는 '해석이 가능한 대상'을 말한다. 글, 음악, 그림, 춤, 사진, 사건 등 어떤 메시지를 담은 것은 모두 텍스트가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인생도 텍스트일 수 있다. 텍스트는 '여러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 덩어리'이다. 글 덩어리는 벽돌만큼 두꺼운 책일 수도 있고 한 줄짜리 시일 수도 있다. 길든, 짧든, 텍스트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콘텍스트를 파악해야 한다. 콘텍스트는 텍스트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환경, 배경, 조건, 사실, 관계, 맥락을 가리키는 말이다. 콘텍스트를 '문맥'이라 옮기는 경우가 있는데 문맥은 의미가 너무 좁다. 글은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문자 텍스트다. 그런데 독자는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다. 내가 쓴 텍스트를 나와 똑같이 해석한다는 ..

회사에서 상호 존중이 어려운 이유

4월 초에 직장에서 '상호존중 문화 확립'을 위한 설문조사를 했다. 설문의 내용은 '우리 사이 상호 존중을 위한 거리는?' '직장 선후배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가장 듣기 싫은 말은?'이었다. 상호 존중 거리는 여러 사람이 1~2미터가 적당하다고 답했다.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역시나 '고생했다, 수고했다'였고, 듣기 싫은 말은 여러 가지가 많이 나왔다. 직장에서, 특히 상사에게 일상으로 듣는 말들이었다. '상사'도 권력이라고 권력 관계의 틀에서만 상호 존중을 바라봐야 하나. 긍정의 말 몇 마디를 하고, 거친 말을 근절하려 한다고 상호 존중 문화가 만들어지나. 다른 부분은 없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적어본다. 얼마 전 참조로 메일을 하나 받았다. 수신인은 출장 세차를 관리하는 직원인데, 출장 세차 ..

조각글쓰기 2022.04.30

'군더더기 없애기'의 예

다음은 초판 다섯 번째 '대공황'편에서 가져왔다. 문장을 단문으로 바꾸고 접속사를 최대한 생략했다. 조사 '의' 남용을 비롯해 어색한 문장 요소는 그대로 두고, 복문을 단문으로 바꾸는 데에 따라 꼭 고쳐야 하는 것만 살짝 손을 보았다. 문장을 끊은 것 말고는 크게 바꾼 게 없다. 하지만 글의 분위기는 제법 크게 달라졌다. O 원래 글 인류에게 불의 저주를 퍼부은 첫 번째 제국주의 세계전쟁이 끝난 후 세계는 다시 '영원한 번영의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 것 같았다. 패전국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전쟁배상금 때문에 어려움에 처했고 아시아 아프리카의 식민지 종속국 민중들은 변함없는 제국주의의 억압과 수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지만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은 눈부신 경제적 부흥을 이루었다. 치열한 군비 증강..

7 김서방댁의 입방아

날로 여위어가는 삼월이를 두고 김서방과 김서방댁이 한밤 중에 대판으로 한번 싸웠다. 불을 끄고 자려는데, "그눔우 가시나 지 푼수에 그 양반 소실 될라 캤던가? 쇠는 짧아도 침은 질게 뱉는다 카더마는, 지 주제에 돌이나 복이나 끼어 맞추어 주는 대로 기다리고 있일 일이지, 낯짝 반반하다고 넘친 생각을 한 기지." "허 참 시끄럽거마는, 잘라 카는데." 김서방은 이불 속에서 혀를 두들겼다. "아 내 말이 그르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치다보지도 말라 캤는데, 사나아들이사 열 계집 싫다 하까? 그 생각을 못하고 지 신세 지가 조졌지." "이 소갈머리 없는 늙은 것아! 삼월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나. 그저 말이라믄 사죽을 못 쓰니께 어이 그만." 김서방은 돌아누웠다. "와요? 이녁 무신 상관 있소?" "......

1부 3편 종말과 발아

지리산으로 되돌아온 최치수는 달포 가량 산속을 헤매어 발 안 닿은 곳이 없었지만 구천이를 찾지 못했다. 구천이, 환이는 우관선사를 찾아 연곡사로 갔다. 무서움에 질린 별당아씨는 거의 발광 상태에 있었다. 최치수는 몇 차례 더 산에 갔다. 처음 흘러나오는 구천이에 대한 얘기는 시일이 지나자, 누구에게서도 들려오지 않고 사그라들었다. 강포수는 결심을 단단히 하고 최치수에게 귀녀를 달라 사정한다. 이튿날, 일행은 사냥에 나서는데, 강포수는 말이 없고 휘청거린다. 노루를 사냥하려는 와중에 소 만한 산돼지가 시야에 들어오고, 총을 쏘았으나 선불이 돼버린다. 산돼지는 방향을 돌려 달려오는데 비명이 나고 수동이의 찢긴 바지 사이에서 분수같이 피가 치솟고 있었다. 강포수는 수동이 부상당한 일보다 명포수인 그가 처음으로..

<표현의 기술> 요약

매 순간 우리는 자신을 표현하며 살아가고 있다. 은 글쓰기로 자신을 표현하면서 살아갈 때 부딪치는 여러 문제에 대한 두서없는 이야기다. 독자들이 경우에 따라 참고할 수 있겠다 싶은 이야기를 몇 가지 담았다. 왜 쓰는가? 조지 오웰은 글 쓰는 이유를 네 가지로 나누었다. 첫째,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욕망 둘째, 의미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학적 열정' 셋째, 역사에 무엇을 남기려는 충동 넷째, 정치적인 목적 누구나 자기의 글 쓰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글쓴이는 정치적-여기서 '정치'는 넓은 뜻이다. 세상을 더 좋게 바꾸는 문제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다-인 글쓰기를 하는데 정치적 글쓰기의 목적은 언제나 '여론 형성'이다. 여론 형성을 목적으로 한 글쓰기는 예술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의사소통 ..

'우리 말 이름'의 예

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그들이 살던 마을, 바라보는 산, 골짜기와 내들의 이름을 모두 지었다고 했다. 그 이름들은 말할 것도 없이 순수한 우리말 이름이다. 마을 뒤 골짜기에 가재가 많이 나면 가재골이라 했고, 나비가 많다고 나비실이라 했다. 밤나무가 많으면 밤나무실, 박달나무가 많으면 박달골이라 이름을 붙였다. 대나무가 많아서 대뫼라고 하는 마을도 있다. 얼마나 자연스럽게 아름답고 부르기 좋은 이름인가? 그런데 중국글자를 숭상하던 양반들은 이런 마을 이름들을 중국글자 말로 지어 붙였다. 양반들이 새로 지어 붙인 마을 이름에는 대개 큰 마을 뿐이었는데, 일본 놈들이 침략해 들어와 총독정치를 하고부터는 모든 마을 이름을 중국글자로 지어 불렀다. 총독이 한 이런 짓은 우리 양반들도 환영하는 바가 되어 그러부터 ..

5 용이네 제사

제삿날 밤, 내외는 목욕재계하고 제상을 차렸다. 한지를 깐 제상에 괸 제찬은 조촐했다. 지방을 모셔놓고 의관을 차려입은 용이 분향을 하고 재배한 뒤 자리에 꿇어앉았다. 소복한 강청댁이 술을 따라 내미는 잔을 두 손으로 받은 용이는 모사에 세 번 따르고 술잔을 강청댁에게 넘긴다. 강청댁이 술잔을 제상 위에 올려놓고 정저 하는 동안 용이 다시 재배한다. 축문을 읽고 강청댁이 두 번째 잔을 올리고 종헌한 뒤 첨작하고 나서 강청댁은 메 그릇의 뚜껑을 열었다. 메에다 수저를 꽂는다. 용이와 강청댁은 제상 밑에 오랫동안 엎드려 있었다. 강청댁의 작은 어깨가 물결쳤다. 소리를 내지는 않았으나 전신으로 울고 있었다. 제상에는 촛불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방과 축문을 불사르고 제수를 물릴 것도 잊은 두 내외는 양켠으로 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