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글쓰기/토지 속 인생이야기 30

31 호호야 주갑의 모습

주갑은 연추에 오면 정호네 집에서 지낸다. 옛날 김훈장처럼. "저기 오누만." 주갑의 눈은 당장 새우눈이 되고 눈 가장자리에 잔주름이 왈칵 모인다. "어련할라구요?" 아이 엄마는 빨래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일곱 살 먹은 사내아이와 다섯 살짜리 계집애가 손을 흔들며, 마치 바람개비처럼 달려온다. "할아버지이! 할아버지!" 주갑은 양 무릎을 벌리고 주저앉는다. 날개처럼 긴 팔을 벌린다. 계집아이가 총알같이 달려와 품에 안긴다. 사내아이는 목에 팔을 감고 늘어진다. "아니고매, 할아부지 엉덩방아 찧겄이야." 아이들은 킬킬거리고 새처럼 재잘거린다. "밥 잘 먹고 잘 있었지라?" "네!" 두 아이를 앞으로 몰아 머리를 쓰다듬는다. "할아부지 이번엔 일찍 왔네?" "암, 숙이가 보고 접어서 한달음에 갔다 왔..

30 강쇠와 피난민 안또병의 만남

한나절은 도끼와 톱을 꺼내어, 오막살이를 지을 나무를 베는 사나이를 도와 강쇠는 일을 했다. 나무를 찍다 말고 담배 한 대를 피우며, "형씨." "예." "나도 어지간하지마는 형씨도 어지간하요." "예? 와 그랍니까?" "여태 통성명이 없지 않소?" "앗, 참, 이거. 내 정신이 아닌갑소." "나는 김강쇠요." "예. 지는 안가고 이름은 또병입니다. 형씨 나이는 우찌됩니까?" "마흔다섯이오." "아이고, 그라믄 형님뻘이구마요. 지는 마흔하나올시다. 그라믄 앞으로 형님이라 부르겄소." 하더니 넙죽 절을 한다. "한창 일할 나이구마." "그러씨요. 사십이 넘어서 처가숙 데불고 길거리로 나왔인께 나일 헛묵은 거 아니겄소?" "거기보다 백배 천배 나은 사람도 나이 헛묵었다 하더마. 사람 사는 기이 다 그런갑소...

29 계명회 검거에 대한 임명빈의 관여

"변호사는? 작정 안 했겠지."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의논들을 해야 않겠습니까? 사건 하나에 여러 사람이 묶여 있으니까요." "그렇지. 나도 그 생각에서 찾아왔네만 누구든 주동하는 사람이 있어야겠고, 그러자면 내가 나설밖에 없겠기에." "형님이 말씀입니까?" "음." "그,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잡듯 영돈은 허둥지둥 말했다. "비용도 마련됐으니까 걱정 말구." "고, 고맙습니다." 영돈이 눈에 눈물이 핑 돈다. "친구니까 나도 앉아 있을 수만 없지. 강도짓을 한 것도 아니겠고 사기 친 것도 아니겠고, " 서참봉댁에서 나오는데 임명빈은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보이지 않는 압력이 머리통을 땅속으로 내리누르는 것만 같다. 집 앞 가까이 갔을 때 아내 ..

28 여자여서 받는 질시와 한탄

두 아낙은 자신들도 모르게 마을 길에 멈추어 선 채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 일도 그 일이고 복동네는 낳지만 않았다 뿐이지 그래도 공이 든 자식이라 어미가 당한 수모, 분풀이를 해줄 줄 알았는데 며누리가 수수밭 얘기를 뒤집어씌운 것은 제쳐놓고 그 늙은이 한 말이 사실이 아닌가 의심을 했다는 깁니다. 며누리도 역시나 그 말을 믿고, 그것이 더 서럽고 억울했던 모앵이라요. 남의 자식 소용없다, 내가 헛살았고, 신령이 어디 있노, 이 세상에 믿을 것 하나 없다, 몇 분씩이나 그런 말을 하더니만 기여," 길섶 풀밭에 풀벌레가 울어쌓는다. 마당쇠댁네는 숫제 길바닥에 주저앉아버린다. 논둑길을 아이들이 소를 몰고 돌아간다. 방울 소리, 또 개구리 울음, 후덥지근한 강바람, 길바닥에 주질러 앉은 마당쇠댁네가 흐느껴 ..

27 명희와 상현, 때 늦은 사랑고백

명희는 전차도 타지 않고 줄곧 걸었다. 효자동 어귀에 이르렀을 때, "제영이 고모 아닙니까!" 하고 바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있었다. "네?" "역시, 아까부터 그런 상싶어서, 급히 왔지요." 상현이었던 것이다. 명희의 낯빛이 확 변한다. "오래간만입니다." 상현의 안색도 파리했다. 몇 해 만인가, 상현의 하숙에서 빗길로 나간 그날 이래 처음 대면이다. 명희 눈에서 눈물이 쏟아진다. 상현이 당황하고 놀란다. 명희도 당황하고 놀란다. 명희의 눈물은 두 사람에게 다 같이 불의의 습격 같은 것이었다. "정말 얼마 만인지......" 눈시울을 흔들어대며, 그러나 눈물은 명희의 의지 밖에서 혼자 마음대로였다. 두 사람은 조금 거리를 두고 걷기 시작한다. "요즘엔 어떻게 지내세요. 여직도 약주 많이 드세요?" ..

26 이십년만의 평사리 추석 잔치

거의 이십 년 만에, 평사리의 추석은 풍성하였다. 올벼를 베었을 뿐 논에는 황금물결이 이랑을 이루고 있었다. 평작은 넘는 농사여서 떡쌀을 담그는 마을 아낙들의 손길은 떨리지 않았고, 옛 지주요 오늘날의 지주인 최서희가 모처럼의 행차 선물인 듯 적잖은 전곡을 풀었으며 밤에는 오광대까지 부른다는 얘기였다. 홍이는 추석놀이를 위해 이틀 동안 아비에게 장고 치는 법을 배우고 또 연습했다. 차례 성묘가 끝날 무렵, 반공중에서 서편으로 해가 약간 기울 무렵 타작마당에 징이 울리면서 놀이는 시작되었다. 놀이꾼들 속에서 용이는 장고를 짊어졌고, 봉기와 성묘차 온 영팔이도 고깔을 쓰고 나섰다. 1903년, 보리 흉년으로 거리마다 아사자가 굴러 있던 비참했던 그해, 마누라를 굶겨 죽이고 그 자신도 실성하여 걸식하던 서금돌..

25 야무네의 아픈 딸 데려오기

방 안에서 어미랑 오라비의 목소리를 들었을 텐데 아무 기척이 없다. "아가." 야무네가 방문을 연다. 푸건은 멍청히 앉아 있었다. 며칠 몇 날을 울었을까, 눈이 부어서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오빠, 날 데리러 왔소?" "가야지, 병 나으믄 도로 오더라 캐도." 딱쇠는 누이의 기막히게 된 모습을 보는 순간 멀기만 했던 생각이, 갑자기 등을 돌리고 달려드는 듯 오열한다. "나는 안 갈 기요, 갈 것 같으믄 콱 고만 죽어부릴라요. 아무리 해도 죽을 긴데 부모 형제까지 못 살게는 못하요. 강서방 하고 함께 죽을 기요." "이 철없는 것아, 그만 날 따라갔이믄....... 하, 하기사." 하다가 야무네는 눈물도 말라버렸는지 햇살이 비치는 방문을 바라본다. 이윽고 발소리가 들려왔다. 방문이 열렸다. 양 ..

24 늙은 용이, 아들 홍이와의 대화

저녁 무렵 용이는 홍이를 데리고 산소로 올라갔다. 술을 부어놓고 삼배하고 술을 뿌리고 나서 부자는 서로 멀거니 바라보며 풀밭에 앉았다. "홍아." "예." "니하고 나하고는 시작도 못하고....... 내가 늙어부린 것 겉다." 홍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무엇을 시작해보지도 못하였는가 잘 알겠기 때문이다. 부자간의 정의도 나누어보지 못하고, 그리고 죽을 날이 가까워왔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마당에 후회나 뉘우침은 없고, 오로지 아들에게 조상의 무덤만을 맡기고 떠나게 되는 것이 안쓰러운 것이다. "아부지!" 홍이는 고개를 떨군 채 흐느껴 운다. 무엇 때문에 세상에 둘도 없는 부자가 싸늘하게 살아야 했던가. 처음에는 아비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다음에는 자신이 받는 고통 때문에, 분출할 길이 없는 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