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그들이 살던 마을, 바라보는 산, 골짜기와 내들의 이름을 모두 지었다고 했다. 그 이름들은 말할 것도 없이 순수한 우리말 이름이다. 마을 뒤 골짜기에 가재가 많이 나면 가재골이라 했고, 나비가 많다고 나비실이라 했다. 밤나무가 많으면 밤나무실, 박달나무가 많으면 박달골이라 이름을 붙였다. 대나무가 많아서 대뫼라고 하는 마을도 있다. 얼마나 자연스럽게 아름답고 부르기 좋은 이름인가? 그런데 중국글자를 숭상하던 양반들은 이런 마을 이름들을 중국글자 말로 지어 붙였다. 양반들이 새로 지어 붙인 마을 이름에는 대개 큰 마을 뿐이었는데, 일본 놈들이 침략해 들어와 총독정치를 하고부터는 모든 마을 이름을 중국글자로 지어 불렀다. 총독이 한 이런 짓은 우리 양반들도 환영하는 바가 되어 그러부터 마을 이름, 땅 이름은 우리말과 중국글자 말 두 가지로 아울러 쓰이더니 차츰 우리말이 덜 쓰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어 일본사람들이 물러갔는데, 일본 사람들이 물러갔으니 땅 이름, 마을 이름을 마땅히 우리말 이름으로 되돌려 불러야 했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도리어 분단 40년 동안 우리말 이름들은 더욱 철저하게 멸시를 받고 시들어 없어지게 되었다. 가재골이라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모두가 '가자곡(柯子谷)'이라하고 나비실은 아주 '첩곡(蝶谷)'이 되고, 밤나무실은 '율곡(栗谷)'으로, 박달골은 '박다동(朴多洞)'으로 대뫼는 '죽산(竹山)'으로 되어버렸다. 모두 엉뚱한 중국글자가 아니면 우리말의 뜻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 어설픈 중국 글 자음으로 된 마을 이름으로 변한 것이다.
또 한 마을 이름은 '행촌(杏村)'이라 했는데, 알고 보니 그 마을에는 옛날에 살구나무가 많아서 '살구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살구골' '살구나무 마을'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그런데 양반들과 일본 총독은 살구나무 행자의 '행'을 따다가 '행촌'이라고 한 것이다. 배나무실을 '이곡(梨谷)'이라고 부르는 마을도 나는 알고 있다.
산 이름도 아주 옛날에는 모두 우리 말 이름으로 불렀다. 촛대봉, 두리봉, 표대배기, 땅밭타랑, 사발봉, 매봉산, 성떰...... 이렇게 그 산의 모양까지 떠올릴 수 있도록 재미있는 이름을 지어 붙였다. 이런 산 가운데서 그 고장 사람들만 알고 있는 작은 산들의 이름은 아직도 그대로 우리 말로도 불리지만, 아주 높은 산, 큰 산의 이름은 모두 중국글자 이름을 가지고 있다. 다행하게도 큰 산 이름이나 강 이름은 중국글자로 붙였지만 모두 부르기 좋은 이름이다.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태백산, 설악산, 속리산, 지리산, 한라산 그리고 압록강, 두만강, 대동강, 한강, 금강, 낙동강, 영산강같이.
이 산 이름과 강이름은 일본총독이 붙인 것이 아니고 아주 옛날 우리 선조들이 지은 것이다. 비록 중국글자 말이기는 하지만 총독 관리들이 마을 이름들을 함부로 마구 지은 것과는 같을 수 없다.
마을 이름, 땅 이름에서 순수한 우리 말이 사라져 가는 역사는 그대로 우리 겨레가 병들고 우리 백성들이 수난을 당하는 역사로 보아야 한다.
우리 나라의 도시 이름, 마을 이름에서 순수한 우리말 이름을 가진 곳이 몇 군데 남아 있을까? 마을 이름이나 도시 이름은 서울밖에 머리에 안 떠오른다. 서울시내 전철역 이름을 살펴보니 '뚝섬'이 있고 '연신내'가 있다. 부산에는 '자갈치'가 있다. 그밖에는 모조리 중국글자 말로 되어 있다. 그래도 몇 개 안 되지만 우리말 이름이 있다는 것은 우리 백성이 아주 죽지는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더구나 우리의 수도가 '서울'이란 이름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하고 마음 든든한 일인가!
여기서 풀이름, 나무 이름, 벌레 이름 들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보고 싶다. 산과 들에 나서 자라나고 있는 물과 나무, 동물과 곤충의 이름들은 모두 농어민들이 지어놓은 것이다. 그 이름들을 알고, 그 풀과 나무, 물고기와 새들을 가까이하며 산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가장 좋은 길이다. 그리고 그런 삶이 곧 이 땅을 사랑하는 마음이 된다.
그런데 요즘은 어떠한가? 사람들의 생태가 아주 크게 변해 버렸다. 우리 나라 사람들처럼 산과 들의 나무 이름, 풀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또 있을 것 같지 않다. 물고기며 새 이름도 그렇다. 도시의 집마다 서양 꽃은 화분에 꽃밭에 심어서 그 꽃 이름을 아이들에게도 알게 하는데, 우리나라 꽃은 보기 드물고 꽃 이름도 모른다. 그러니 산과 들에 피고 지는 꽃이며 풀과 나무를 어찌 알겠는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역사가 반민주*반민족으로, 반자연*반인간으로만 끌어 왔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아이들도 봄이 되면 부모를 따라 산과 들에 가서 온갖 풀을 캐고 나물을 뜯으면서 그 이름을 알게 되었다. 여름이면 냇물에서 온갖 물고기들과 살았다. 가을이면 산에서 여러 가지 나무 열매를 따먹으며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들이 교과서의 그림으로 겨우 몇 가지 꽃 이름을 배운다. 그림책에도 서양 꽃이 주로 나온다.
옛 사람들은 풀이름, 나무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가? 잎이 삿갓처럼 생겼다고 삿갓 나물이라 하고, 그 열매가 쥐똥같다고 해서 쥐똥나무라 했다. 애기똥풀이 있는데, 이것은 그 꽃의 색깔과 줄기를 꺾었을 때 나오는 물이 젖먹이 아기의 똥 같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달개비꽃은 그 꽃잎이 꼭 닭의 볏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인 이름일 것이다. 즉 '닭의 볏'이 달개비로 된 것이다. 은방울꽃도 꽃 모양을 눈앞에 그리게 하는 이름이다.
씀바귀는 그 맛이 쓰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고, 봄날 들판에서 뜯어 먹던 시금치도 그 맛이 시다고 그렇게 말했다. 5월에 꽃이 피는 조밥나무는 그 꽃이 조밥 알같이 작은 것이 한데 모여 피기 때문이고, 같은 때에 피는 이밥나무 꽃은 이밥같이 풍성한 느낌을 주는 꽃이다. 모두 춘궁기에 피는 꽃이라 '밥'을 연상하는 꽃 이름을(산나물을 뜯으면서) 붙였을 것이다.
6월에 피는 뻐꾹채꽃이 있다. 뻐꾸기가 "뻐꾹, 뻐꾹"하고 울기 시작할 때 이 꽃이 핀다. 아마 틀림없이 뻐꾸기 이름을 그 꽃에 붙였을 것이다. 이른 봄 논둑 밭둑이나 산기슭에 피는 제비꽃은 제비가 찾아올 때 핀다고 그렇게 지은 것 아닐까? 민들레꽃을 경북 지방에서는 말똥굴레꽃이라고 하는데, 말똥굴레가 봄이 와서 말똥, 소똥을 열심히 뭉쳐 굴리고 있는 길가에서 피는 꽃이니 얼마나 잘 어울리는 이름인가.
질경이란 풀이름은 듣기만 해도 그 생명력이 모질고 끈질기겠다는 느낌을 준다. 엉겅퀴, 댕댕이덩굴...... 풀이름을 말할 때 울리는 그 소리의 느낌만으로도 그 풀의 모양이 눈앞에 나타난다.
미나리가 있는데, 그 미나리와 비슷한 또 다른 풀이 있으니 이것은 미나리아재비가 된다. 도깨비바늘, 쥐오줌풀...... 재미있는 이야기가 풀이름마다 들어 있는 듯하다. 온갖 동물과 벌레들이 풀과 나무와 이야기하는 세계가 여기 있다.
이 모든 이름들은 자연 속에서 일하며 살아가던 농어민들이 지은 것이다. 그래서 그 이름들은 자연스럽고 아름답고 재미있고, 그 이름만 불러봐도 즐겁다.
그런데 이런 민중의 삶을 멀리하고 있던 양반들이나 학자들은 이런 자연에 대한 이름조차 잘못 만들어 붙였다. 도라지를 '길경'으로, 으름덩굴을 '목통'으로, 아주까리를 '피마자'로, 모란을 '목단'으로, 애기똥풀을 '백국채'로, 질경이를 '차전자'로, 콩을 '대두'로...... 우리 말의 뜻과 소리의 느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중국글자의 음, 곧 중국말소리를 우리의 풀과 나무 이름으로 갖다 붙인 것도 중국 글만 들여다보며 살아가던 양반들이었다.
왕조시대 양반들뿐 아니고 일제시대 이후의 지식인들도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 우리나라의 모든 시인들은 두견새를 노래한 시를 읊으면서 그것이 사실은 소쩍새란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지적은 미승우 씨가 한 바 있지만, 이것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실제의 삶에서 떨어져 있는가, 책 속에서만 살고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일본어로 번역한 러시아 문학을 읽은 우리들은 톨스토이나 투르게네프의 작품에 가끔 나오는 '白樺'나무를 그대로 '백화나무'로 읽고 번역할 줄밖에 몰랐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은 자작나무였다. 서양인들의 시에 나오는 '들장미' '야장미'도 우리는 번역한 것을 그대로 읽고 그대로 말해오면서 그것을 '찔레꽃'으로 바꿔 생각할 줄은 몰랐다.
'나이팅게일'이란 새 이름도 일본어 번역 따라 '밤꾀꼬리'로만 하지 말고, 실제 그 새 모양과 소리를 듣고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새에 가장 가까운가를 판단해서 그 이름을 옮겨 적어야 한다고 본다.
남의 나라의 새 이름, 서양에 있는 나무 이름이야 잘못 옮겨 쓴다고 해도 그렇게 큰 해를 입지는 않는다. 정작 문제는 우리 것이다. 우리 나라의 작가들은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는 풀이며 나무며 새들의 이름을 너무 모른다. 모를 뿐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글에 나오는 자연은 그저 이름 모를 풀이요 이름 모를 새 들이다. 이 땅의 자연을 모르고서 이 땅의 인간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백성이 그 속에서 살면서 역사를 만들어 오고, 백성의 마음에 무늬를 주고 빛깔을 준 자연은 그냥 이름 모를 풀이나 나무가 아니라 하나하나 분명한 우리말의 이름을 가진 꽃이요 풀이요 나무요 새다. 우리 겨레의 혼이 깃든 보금자리인 그 자연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이 땅의 문학이요 예술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글 바로쓰기1> 239쪽 발췌
* 윗 글은 5,000자나 되어 줄여볼까 싶지만 대부분이 사례이고, 이 사례들은 콘텍스트로 기능해서 읽는 이의 감정을 끌어낸다. '여러' 이름들을 말하고 있어 '우리말 이름'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짧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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