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글쓰기/토지 속 인생이야기

27 명희와 상현, 때 늦은 사랑고백

밭알이 2022. 12. 26. 12:00

  명희는 전차도 타지 않고 줄곧 걸었다. 효자동 어귀에 이르렀을 때,
  "제영이 고모 아닙니까!"
하고 바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있었다.
  "네?"
  "역시, 아까부터 그런 상싶어서, 급히 왔지요."
  상현이었던 것이다. 명희의 낯빛이 확 변한다.
  "오래간만입니다."
  상현의 안색도 파리했다. 몇 해 만인가, 상현의 하숙에서 빗길로 나간 그날 이래 처음 대면이다. 명희 눈에서 눈물이 쏟아진다. 상현이 당황하고 놀란다. 명희도 당황하고 놀란다. 명희의 눈물은 두 사람에게 다 같이 불의의 습격 같은 것이었다.
  "정말 얼마 만인지......"
  눈시울을 흔들어대며, 그러나 눈물은 명희의 의지 밖에서 혼자 마음대로였다.

  두 사람은 조금 거리를 두고 걷기 시작한다.
  "요즘엔 어떻게 지내세요. 여직도 약주 많이 드세요?"
  "배운 술이 어디 가겠습니까?"
  "신문사에는 나가시나요?"
  "아닙니다."
  "그럼 시골 가셨더랬습니까?"
  "아닙니다. 곧 떠나려구요."
  "떠나다니요?"
  걸음을 멈춘다.
  
  "명희 씨."
  "네."
  "명희 씬 행복하지 못합니다."
  "......."
  "그렇지요?"
  "그래요, 행복하지 못해요!"
  날카롭게 내뱉는다.
  "비웃는 건가요? 행복하지 못한 것이 제 탓이란 말인가요?"
  "그럼 내 탓이다 그 말입니까?"
  상현은 어색하게 웃는다.
  "그때 제가 선생님 하숙을 찾아간 일이 있었지요?"
  "빗길로 내쫓았지요."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제가 그 일을 창피하다 생각한 줄 아셨던가요?"
  "아닙니다."
  "저는 선생님을 비겁한 사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얘기 해도 되겠습니까?"
하며 상현도 초조한 듯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린다.
  "오히려 안심하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닐까요?"
  "......?"
  "저도 그렇고 이선생님도, 다 같이 장래는 이미 결정이 돼버렸으니까요. 아무 변동도 없을 거예요. 두려워할 아무런 것도 없는 거 아닐까요?"
  상현은 꿈틀하듯 한순간 걸음을 옮겨놓지 못한다. 명희는 어느새 이렇게 당당해졌는가.

  "그렇지요. 두려워할 아무것도 없는 거지요. 나는 떠나니까요!"
  때쓰는 아이같이 화를 낸다.
  "맞습니다. 명희 씨 말대로요. 잘 들어두십시오. 명희 씨! 내가 명희 씨 행복이나 빌 그런 사내인가요? 불행하라고 빌었음 빌었지. 사실 불행하리라 믿기도 했구요. 만일 행복했더라면 질투 때문에 몸이 타버렸을 겁니다!"
  상현은 별안간 악을 썼다.
  "나는 여자를 하나도 얻지 못했어요. 처음 여자는 나보다 딴 사내를 좋아했구요. 두 번째 여자까지 딴 사내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나는 악마가 됐을지도 모르지요! 내 지금 기분이 그렇다는 얘기요! 네, 장래가 정해져 있으니까 두려울 것이 없다! 피장파장 비겁하고 회피하는 상태는 매일반이오!"
  "서희 씨는 아이아버지를 무척 사랑했나 부지요?"
  "......"
  "어떻습니까? 질투 때문에 몸이 타오릅니까?"
  "잊었습니다. 어처구니없게...... 생각을 속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까요?"
  상현은 껄껄껄 소리 내어 웃는다. 뜻밖에 그는 홀가분해하는 표정이다. 명희도 웃는다. 사랑의 고백치고 피차가 지나치게 격렬하고 거칠기조차 했는데 그들은 심각해지는 대신 웃은 것이다. 속을 털어버린 시원함이 그들을 웃게 했을까. 입으로만 태워버린 정열의 허무함 때문에 웃었을까. 상현은 명희가 자신의 불행한 자리를 지킬 것이란 확신을 얻었다. 명희는 상현이 떠날 것이며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웃었는지 모른다.


                                                                        토지 11권 11쪽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