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이십 년 만에, 평사리의 추석은 풍성하였다.
올벼를 베었을 뿐 논에는 황금물결이 이랑을 이루고 있었다. 평작은 넘는 농사여서 떡쌀을 담그는 마을 아낙들의 손길은 떨리지 않았고, 옛 지주요 오늘날의 지주인 최서희가 모처럼의 행차 선물인 듯 적잖은 전곡을 풀었으며 밤에는 오광대까지 부른다는 얘기였다. 홍이는 추석놀이를 위해 이틀 동안 아비에게 장고 치는 법을 배우고 또 연습했다. 차례 성묘가 끝날 무렵, 반공중에서 서편으로 해가 약간 기울 무렵 타작마당에 징이 울리면서 놀이는 시작되었다. 놀이꾼들 속에서 용이는 장고를 짊어졌고, 봉기와 성묘차 온 영팔이도 고깔을 쓰고 나섰다.
1903년, 보리 흉년으로 거리마다 아사자가 굴러 있던 비참했던 그해, 마누라를 굶겨 죽이고 그 자신도 실성하여 걸식하던 서금돌 노인은 없지만, 가락에 겨워 굽이굽이 넘어가던 구성진 그 목청은 없지만 놀이는 옛적과 다름없이 가슴 설레고 흥에 겨운 것이다. 느릿느릿 징을 치던 두만아비도 없고 북을 치던 칠성이, 팔팔 거리던 윤보, 한조는 모두 세월에 쓸려서 가고 없지만 놀이는 변함없이 흥겹고 가슴 설레는 것이었다.
하얀 베수건 어깨에 걸고 싱긋이 웃으며 맴을 돌며 장고채를 잡던 인물 잘난 사나이, 이제는 늙고 병든 몸이, 장고도 어깨에 무겁고 맴을 돌 때마다 눈앞은 캄캄하다. 용이는 아들에게 장고를 넘겨주며 눈물짓는다. 영팔이와 봉기도 고깔을 흔들어보다가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고, 젊은 청춘들만이 아득한 갈 길을 오늘 하루나마 잊고, 내일은 보리죽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타악기에 말려들어 땅을 구르며 난무한다. 꽹과리는 경풍 든 것처럼 빠르게, 드높게 울리고 징은 여음을 따라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장고와 북이 어울린다. 홍이는 자기 장단이 없다. 저절로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타악도 사람도 함성도 한 덩어리가 되어 울리고 움직인다. 구경꾼도 산천도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울린다.
"아바이하고 영상이다(흡사하다). 젊었을 때 이서방이 꼭 저랬네라, 우짜믄 인물이 저렇기도 좋겄노."
홍이는 상기되어 맴을 돌며 장고채가 휘청거린다.
"참말로 세월은 눈 깜짝하는 새,"
"심 좋다던 영팔이도 나이는 못 속이는개 비여."
"전에는 두리아배도 헤죽헤죽 잘 웃어쌓더마는."
야무네와 복동네와 파파할멈이 다 된 영산댁의 말이다.
하늘에는 잔별도 많다.
쾌지나칭칭 나아네!
시내 강변 잔돌도 많다.
쾌지나칭칭 나아네!
타악이 늘어지면서 노랫소리가 높아지니 춤은 멎게 된다. 놀이꾼들은 숨을 돌리듯 보조를 맞추어 노래를 위주로 한다. 갑자기 희열이 절정에서 비애의 나락으로 떨어진 듯, 오열하고 하소연하며 멍울 같은 한이 가락마다 굽이굽이 넘어간다. 다시 타악기는 신들린 것처럼 빨라진다. 선창은 사라지고 쾌지나 칭칭 나아네! 쾌지나 칭칭 나아네! 되풀이 되풀이 보다 빠르게, 놀이꾼들의 몸은 팽이같이 돌아간다.
토지 10권 187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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