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글쓰기/토지 속 인생이야기 30

14 서로 의지하는 용이와 영팔이의 헤어짐

영팔과 용이 걷는다. "용아." "음." "아무래도 시일이 좀 걸리겠제?" "가봐야 알겄지마는 일찍 오믄 머하겄노. 용정에는 아직 집일이 한창일 기고 품 좀 팔다가 산에 들어갈 시기쯤 해서 오든가." "여기도 품일이야 얼매든지 있지. 웬만하믄 추석은 여기 와서 쇄라." "가봐서." 한참 동안 말없이 걷다가 영팔이 입을 연다. "나는 니가 온다니께 이자는 살 성싶다. 우떡허든지......" "......" "뻬가 빠지는 한이 있어도 돈 모아서 고향 가야제. 맘 겉에서는 빌어묵으서라도 가자......하로에도 몇 분 그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이 험한 고장에 와서 돼지겉이 살믄서 되놈들 종 노릇까지 할라 카니, 지금 생각하믄 그때가 청풍당석이던 기라." "그렇지마는 고향 돌아가는 일이 그리 쉽겄나. 조가 놈이..

13 목수 윤보의 죽음

언제였었던가. 육도천의 시뻘건 흙탕물 위로 숨바꼭질하듯 떠내려가던 바가지 한 짝이 있었지. 숨바꼭질하듯 떠내려가던 바가지 한 짝이 부어오른 송장의 배로 착각이 된다. '이눔우 자석아 송장이 다 돼가는 나를 여기 떠메다 놓고 죽는 마당에 호강을 시키겠다 그 말가? 애라 아서라. 참말로 멋대가리 없는 짓이다.' 죽음 직전의 윤보 목소리다. '니는 모른다. 니는 몰라. 하늘을 쳐다보고 뫼까매귀 소리를 들으믄서, 야 이놈아아야 방구석에서 죽는 것보담, 죽으믄서 계집새끼 치다보믄서 애척을 못 끊는 불쌍한 놈들보다 얼매나 홀가분하노.' '허허 이 사람아. 그만 지껄이게. 죽기는 왜 죽어.' 김훈장이 말을 막았다. 몸에서 피비린내 땀내음이 풍겨왔으나 윤보의 눈은 맑았고 빛이 있었다. '생원님, 입도 흙 속에 들어가믄..

12 길상과 어린 옥이의 첫 대화

그곳은 처마 밑이었는데 계집아이 하나가 벽 쪽에 등을 바싹 붙이고 앉아 있었다. 낙수에 패여 땅이 움푹한 곳에 괴다가 흐르곤 하는 빗물에 연방 생기고 꺼지고 하며 흐름을 따라가는 거품을 계집아이는 손가락 끝으로 지우고, 지우곤 하는 것이다. 귀밑머리를 쫑쫑 땋아 뒷머리와 한 묶음이 된 노르스름한 머리털이 축축이 젖어 있다. 계집아이는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눈을 들다가 어른의 구둣발을 보고 차츰차츰 고개를 치올린다. 뉘한테 야단을 맞았는지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남아 있다. "옥아?" "......." "뭘 하고 있니." "아주방이." "오냐." "어째 내 이름으 알지비?" 길상은 빙그레 웃는다. "옥이는 아주방일 모르겠어?" "응."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눈치다. 하기는 그때 옥이 눈에는 먹을 것 이외..

11 월선, 김서방댁과 봉순이의 서로 위로하는 대화

월선의 집에 이른 봉순이는, "아지매요!" 하고 부르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추위에 입술이 굳어져서 목소리가 작았다. 방 안에서 도란도란 씨부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지매요!" "누고오!" "나 봉순이오!" 얼른 방문이 열린다. "아이고오, 봉순이구나. 이 칩운 날에 니가 우짠 일이고. 어서 들어오니라." "봉순이가 왔다고?" 월선이 뒤에서 김서방댁의 거무튀튀한 얼굴이 나타났다. "김서방댁!" 방 안으로 들어선 봉순이는 그만 울음을 터뜨린다. "와 이라노. 봉순아." 월선이는 딱해하며 봉순이 등을 두드리고 김서방 댁은 입을 비죽비죽하다가 함께 따라서 눈물을 흘린다. 자기도 울면서 우지 마라, 하며 때 묻은 치맛자락을 걷어 눈물을 닦는다. 김서방 댁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김서방댁은 우찌 사요." 겨..

10 김개주와 김환, 부자의 대화

언제였던지, 부친이 몸져누운 일이 있었다. 환이는 밤을 새워 부친의 시중을 들었다. 모두가 다 잠들었을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이었다. "환아." "예, 아버님." "너 대장부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촛불에 그늘진 얼굴을 환이 쪽으로 돌리며 느닷없이 물었다. "아버님 같은 분을 대장부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대장부라는 것은 허욕이니라." "예?" "나도 내 자신을 만백성 구하려고 창칼을 들고 나선 사내, 그런 사내 중의 한 사람이거니 자부하고 싶다. 때론 그렇게 믿기도 하고."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아버님을 우러러보고 있는지 그것을 모르시어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환이는 진심에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직 어린 네가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러나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리지 ..

6 함안댁의 죽음

"무신 보기 좋은 구겡거리가 났다고 이리들 서 있노! 영팔이 니 이리 오나! 거기 벅수(바보)겉이 서 있지 말고." 고함 소리에 뻗장나무같이 영팔이 앞으로 나서는데 얼굴은 평소보다 더 길어 보였다. 꾹 다문 입술이 삐죽삐죽 열릴 것만 같았다. 비에 젖어서 눅진눅진해진 새끼줄을 잡아 끊고 치마를 둘러쓴 시체를 윤보와 영팔이 끌어내린다. "아까운 사람, 엄전코 손끝 야물고 염치 바르더니." 방으로 옮겨지는 시체를 따라가며 두만네는 운다. "그러기, 매사가 야물고 짭찔터마는." 서서방의 늙은 마누라도 눈물을 찍어낸다. 옮겨지는 시체를 따라 사람들이 방 앞으로 몰릴 때 봉기는 짚세기를 벗어던지고 원숭이같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목맨 새끼줄을 걷어 차근차근 감아 손목에 끼고 난 다음 나뭇가지를 휘어잡으며 툭툭 분..

9 두만아비의 아들 부탁

저녁이 끝나고 두만네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데 모깃불을 피워놓고 곰방대를 물고 있던 두만아비는 슬그머니 일어섰다. 삽짝을 나서려 하자 부엌에서 두만네가, "어디 가요?" 하고 물었다. "음." "밤이 저물어도 사돈이 오시믄 우짤 기요?" 그러나 두만아비는 아무 말 없이 나간다. 마을 정자나무 옆을 지나서 언덕을 올라간다. 외딴 언덕 위에, 윤보가 사는 초가의 모깃불이 보였다. "거기 오는 기이 누고." 윤보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나다." "나라니?" "이평이다." "짚세기나 삼을 일이지 머하러 왔노." 거적을 깔아놓고 마당에 누워 있던 윤보는 부시시 일어나 앉는다. "와 오믄 안 되나?" "우리 집이사 사통팔방이니께, 금줄을 칠라 캐도 삽짝이 있이야제. 산짐승도 오는데 사람 못 올 기이 머..

8 임이네의 출산

방 안에서 임이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녁이 좀 들어와야겄소." "내가?" "그라믄 우짤 기요? 이 차중에 아무도 없이 우찌 아일 낳을기요?" "내, 내가." "그, 그라믄 우짤 기요? 누구 자식인데 이녁이 그러요!" 화내는 소리에 용이는 더듬듯 마루를 올라선다. 방문을 연다. 문바람에 등잔불이 흔들렸다. 벽을 짊어지고 앉은 임이네는 무서운 눈으로 용이를 노려본다. 머리를 벽에 부딪으며 임이네는 소리를 질렀다. 진통이 오는 모양이다. "아이구우, 어매! 나 살리주소!" 두 손을 쳐들고 허공을 잡는데 이빨과 이빨이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눈알이 튀어나올 듯, 이마에서 두 볼에서 구슬땀이 솟아나온다. 임이네는 앞으로 넘어져 오며 두 팔로 용이 정강이를 안는다. 여자의 팔은 쇳덩이같이 단단했다. 두 팔은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