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글쓰기/토지 속 인생이야기 30

23 서희와 조준구의 최종거래

"집은 얼마에 내놓으셨지요?" 서희의 침묵이 깨어졌다. "집을 내어놓다니?" "......." "집문서는 언제든지 내줄 수 있고 명의변경도." "안 파시겠다, 그 말이구먼." "그, 그렇지." "그러면 만날 필요가 없지요." "굳이 그렇다면야," "굳이가 아니에요!" 서희 눈에서 불덩이가 떨어지는 것만 같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필요한 돈은 오, 오천 원인데," "오천 원에 내놓으셨군요." "......." "서류는 가져오셨나요?" "가, 가지고 있지." "유모." "예, 마님." "안방에 가서 머릿장 속에 있는 푸른 보자기를 가지고 오시오." "네." 유모가 나간 뒤, "고맙네, 고마워." 서희는 남쪽으로 트인 창문에 눈을 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유모가 나타났다. 서희는 지폐 다발을 내민..

21 죽어가는 월선과 용이의 만남

섣달그믐 날 해거름이었다. 망태 하나를 어깨에 걸머지고 초췌해진 사내가 집안으로 들어섰다. 솜을 두어 누덕누덕 기운 반두루마기도 벗어던진다. "홍아!" "홍아! 아버지 왔다!" 홍이 안방 문을 박차듯 뛰어나온다. 동시에 작은방의 문이 떠나갈 듯 열렸고 영팔이와 두매가 나왔다. 홍이의 얼굴은 홍당무였다. 모두 벙어리가 되어버렸는지 용이 뒷모습을 쳐다본다. 누구 한 사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몸 전체에서 뿜어내는 준엄한 기운에 세 사람은 압도되어 선 자리에 굳어버린 채다. 방문은 열렸고 그리고 닫혀졌다. 방으로 들어간 용이는 월선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을 월선은 눈이 부신 듯 올려다본다. "오실 줄 알았십니다." 월선이 옆으로 다가가 앉는다. "산판 일 끝내고 왔다." 용이는 가만히 속삭이듯 말했다. "야...

20 임이네와 임이, 그 어미에 그 딸

임이는 방문을 닫아주고 마루에 걸터앉은 월선의 뒷모습을, 그의 주변을 유심히 쳐다본다. 뭐 가져온 거나 없는지 살피는 눈초리다. "아이구 내사 마, 머가 먼지 모리겄네. 간도댁 엄마요." "와." "봉순이는 부자한테 시집갔는가 배요? 주산이(비단)를 감고 찬물에는 손도 안 넣는 팔자 겉이 뵈니께." "......." "사램이 심사가 따로 있소? 내 팔자 생각한께 천양지간이고, 부모 없는 봉순이도 팔자가 저리 쭉 늘어졌는데 나는 와 이렇겄소? 세상에 촌놈도 그런 촌놈은 없일 기고 살림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군식구라고 아무 데나 치았인께. 야속하요." "씰데없는 소리." 부엌에서 달가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임이는 사냥개처럼 그 소리에 민감하다. 신발을 끌고 부엌으로 급히 간다. "어매 멉니까?" "머기는..

19 길상, 서희와 봉순이의 만남

불이 환하게 비쳐 나온 서희 방을 향해 길상은 다가간다. 방엔 팽팽하게 불빛이 들어찬 것 같고 넘쳐서 굴러 나올 것만 같은 긴장감을 길상은 느낀다. 신돌 아래서 기침을 한다. 그리고 방 앞에 가서, "들어가도 좋소?" "네." 짤막한 서희의 대답이다. 방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봉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방님, 오래간만이오." 조용한 음성, 조용한 몸가짐, 역시 봉순은 기생이었다. 서희는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래간만이군. 그간 별일 없었겠지?" 길상은 엄청나게 변모한 봉순에게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별일이 없었느냐는 말도 실수였고, 봉순은 배시시 웃었다. "별일이 왜 없었겠습니까?" 길상도 실소한다. "앉지." "네." 비로소 길상은 서희에게 눈길을 돌린다. "속이 안 좋다고 했는데 괜찮소?..

18 서희와 봉순이의 해후

"그건 그렇고, 길상이는 지금 이곳에 있지 않소이까?" 혜관은 비로소 말을 중단하고 기화에게 재빠른 시선을 던진다. "서방님께서는 회령 나가셔서 안 계시오. 내일께나 오실는지요." 기화의 머리가 앞으로 확 수그러지고 혜관은 파리 잡아먹은 두꺼비처럼. 혜관이나 기화가 다 같이 예상했던 대로다. 그러면서도 충격이었다. 능글맞은 혜관도 숨이 막히는 듯 짓눌린 한숨이 가느다랗게 새어 나왔다. "그러면은 스님께선 별채에 가셔서 쉬시겠소?" 서희가 침묵을 잡아젖혔다. "쉬기보담 허기부터 달래야겠소." 혜관은 얼버무린다. "네. 저녁을 곧 올리도록 하겠소. 봉순인 나랑 함께......." "네." 기화 얼굴은 온통 눈물에 젖어 있었다. 혜관이 부산스럽게 나간 뒤, "애기씨!" "응." 서희 눈에 처음으로 눈물이 핑 ..

17 관수의 불손함과 꾸짖는 혜관

혜관은 자갈이 한없이 깔려 있는 강변이자 관수의 처가, 울타리 없이 마당 구실을 하고 있는 곳을 바라본다. 여러 날 비를 보지 못한 강변 자갈 위의 햇볕은 봄이지마는 뜨겁게 느껴진다. 쇠가죽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어리 속에 병아리가 삐약거리고 아랫도리를 벗은 아기가 자갈밭을 뒤뚝거리며 걸어가고 다람쥐같이 젊은 여자 하나가 달려 나오더니 아기를 안고 도망치듯 부엌 쪽으로 뛰어간다. 하얗게 바래어진 자갈밭은 백정네 인생처럼 살풍경하다. 마을을 흘러 다니며 가락을 뽑는 광대들의 그 한 맺힌 가락 하나 없이, 햇볕에 타고 있는 쇠가죽처럼 핏빛에 얼룩진 백정네 인생이 거기, 자갈밭에 굴러 있다. "나무관세음보살." 혜관의 염불 소리였다. 관수의 눈이 희번득인다. 머리 골이 울툭불툭한 혜관의 옆모습을 쏘아본다. ..

16 관수의 바른소리 하기

쪼깐이 집의 국밥, 무를 엇비슷이 썰어 넣고 끓인 생대굿국이다. 석이 입에 쫄깃쫄깃한 대구 살이 달다. 젖 빛깔이 방울방울진 고기는 입속에 들어가기가 바쁘게 녹는다. 향긋한 생파 내음, 사발의 바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발을 기울이며 남은 것을 아쉽게 퍼올리는 석이 모습을 여자는 멸시의 눈으로 힐끗 쳐다본다. 눈살을 찌푸린다. "아지마씨." "예." "물지게꾼이 내놓는 국밥 값은 썩은 돈이오?" "무슨 말을 그렇게." 느닷없이 하는 말에 여자는 당황한다. "똑똑히 들으시오, 각시. 그렇지 두만이 각시믄, 작은 각시든 큰 각시든 각시는 각시니께로." "아니." 얼굴이 벌게진다. "보소 서울각시, 각시 씨애비 씨에미 그라고 서방도 다 그렇기 누데기옷을 입고 살아왔소. 그거는 그렇다 치고 또 니는 머꼬? 술..

15 서희와 길상의 다툼

길상은 말을 뚝 끊고 고개를 숙인다. 조는가 했더니 자맥질하던 해녀같이 얼굴을 치켜세운다. 몽롱한 취안이다. 씩 웃는다. "최서희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어? 흥, 천하를 주름잡을 텐가? 어림도 없다!" 어조를 싹 바꾸며 반말지거리다. 장승처럼 서 있는 서희 얼굴에 경련이 인다. "넌 일개 계집아이에 지나지 않단 말이야! 거 꿈 하나 거창하지. 아무리 돼지 멱따는 소리 질러봐야 이곳에 구종별배도 없고 으음, 있다면 왜놈의 경찰이 있겠구먼. 흥, 그 새 뼈가지 몸뚱이로 어쩔 텐가? 난 지금이라도 널 희롱할 수 있어. 버릴 수도 있고 흙발로 짓밟을 수도 있고 가는 모가지를 비틀어 죽일 수도 있다 그 말이야. 나 술 안 취했어. 내 핏속엔 술이 아니고오, 음 그렇지 그래. 대역죄인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게야.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