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 용이는 홍이를 데리고 산소로 올라갔다. 술을 부어놓고 삼배하고 술을 뿌리고 나서 부자는 서로 멀거니 바라보며 풀밭에 앉았다.
"홍아."
"예."
"니하고 나하고는 시작도 못하고....... 내가 늙어부린 것 겉다."
홍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무엇을 시작해보지도 못하였는가 잘 알겠기 때문이다. 부자간의 정의도 나누어보지 못하고, 그리고 죽을 날이 가까워왔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마당에 후회나 뉘우침은 없고, 오로지 아들에게 조상의 무덤만을 맡기고 떠나게 되는 것이 안쓰러운 것이다.
"아부지!"
홍이는 고개를 떨군 채 흐느껴 운다. 무엇 때문에 세상에 둘도 없는 부자가 싸늘하게 살아야 했던가. 처음에는 아비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다음에는 자신이 받는 고통 때문에, 분출할 길이 없는 젊음이 이지러지고 비뚤었기 때문에.
"니는 이곳에 정이 안 들 기다. 그라고 니가 이곳에 있어 머하겄노. 얽매이서 산 것은 내 하나로 끝내는 기다. 니는 니 뜻대로 한분 살아보아라. 내 핏줄인데 설마 니가 나쁜 놈이야 되겄나."
"아, 아부지이!"
"눈물이 헤프믄 못씬다. 남자는 몸부림을 치고 땅을 쳐도 눈물만은 함부로 흘리는 기이 아니다. 그라고 또 내 부탁이 하나 있는데."
"......."
"내가 좀 더 살믄은 내 손으로 할라고 했더마는...... 그리했이믄 좋겄다마는, 용정에 있는 니 어매를 여기다 이장해 왔이믄 싶다. 시일이 걸리더라 캐도 명념해두었다가 니가 할 수 있을 적,"
"아부지, 지가 잘못했소!"
홍이 흐느낌은 통곡으로 변했다.
"아니다. 내가 잘못했제. 내가, 내가 니한테 잘못한 기이 많다."
"아니요, 아부지."
"어둡어온다. 이자 내리 가는 기이 좋겄다."
용이는 지팡이를 들었다. 홍이 눈물을 닦고 아비를 부축한다.
"홍아."
"예."
용이는 나직한 소리로 웃었다.
"내가 말이다."
"예."
"부럽아한 사람이 둘 있었다."
홍이는 덮어놓고 영문도 모르면서 무척 명랑해진 듯한 용이 기분에 웃는다.
"주갑이라는 사람은 니도 알제?"
"알구말구요. 참 좋은 사람이었지요."
"음, 있는 그대로 살았제. 그 사람이 나는 부럽았고, 또 한 사람이 있는데 니는 모를 기다. 죽었인께 만내볼 수도 없고."
"이 동네 사람입니까?"
"하모. 서금돌이라고 목청 좋고 신이 많고......."
사방은 차츰 어두워온다.
토지 9권 366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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