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팔과 용이 걷는다.
"용아."
"음."
"아무래도 시일이 좀 걸리겠제?"
"가봐야 알겄지마는 일찍 오믄 머하겄노. 용정에는 아직 집일이 한창일 기고 품 좀 팔다가 산에 들어갈 시기쯤 해서 오든가."
"여기도 품일이야 얼매든지 있지. 웬만하믄 추석은 여기 와서 쇄라."
"가봐서."
한참 동안 말없이 걷다가 영팔이 입을 연다.
"나는 니가 온다니께 이자는 살 성싶다. 우떡허든지......"
"......"
"뻬가 빠지는 한이 있어도 돈 모아서 고향 가야제. 맘 겉에서는 빌어묵으서라도 가자......하로에도 몇 분 그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이 험한 고장에 와서 돼지겉이 살믄서 되놈들 종 노릇까지 할라 카니, 지금 생각하믄 그때가 청풍당석이던 기라."
"그렇지마는 고향 돌아가는 일이 그리 쉽겄나. 조가 놈이 있는 한에는 고향 가기 어럽을 기다. 의병 나갔다고...... 여기서도 의병이라 카믄 왜놈우 순사들 핏발을 세우는데."
"머 나도 그쯤은 생각 안 해본 것은 아니다. 고향에는 못 가더라도 근가죽(근처)에 가서...... 아 지리산에 들어가서 화전을 부치 묵더라 캐도...... 참말로 하나님은 무심타. 죄 없는 백성을 이렇기 고초를 겪게 하다니, 하기야 죽은 사람 생각을 하믄 명 보전한 것만도 고맙기 생각해야 겄지마는 죽은 윤보형님 생각을 하믄 실프네 서럽네 말도 못하겄다마는."
"멩이 붙었다고 머 고마울 것 하낫도 없다. 윤보형님은 그렇기 잘 죽었지. 죽을 때 육신을 벗어던지고 훌훌 잘 날라갔지 머,"
사십이 넘은 두 사내는 별빛을 밟고 주거니 받거니, 헤어질 줄 모르고 간다.
서로의 마음에 친구 이상의 것이 짙게 흐르고 있다. 한 살갗 한 피 같은 것이, 여자에 대한 그리움과는 또 다른 그리움, 그것은 서로를 통하여 고향을 느끼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향, 어쩌다가 고향을 잃었는가.
"이자 그만 돌아가거라."
"음."
"언제꺼지 따라올라 카노?"
"조금만 더, 아직 날이 안 밝았다."
한동안 묵묵히 걷는다.
개천가에까지 온 용이는,
"이자 돌아가거라."
"그러까?"
용이는 개천에 놓인 돌을 건너뛰고 영팔이는 머문다.
"그라믄, 될 수 있는 대로 어서 오라고."
"음."
용이는 걸음을 빨리한다. 그리고 용이는 돌아보지 않았고 영팔이는 오랫동안 서 있다가 용이 모습이 조그맣게, 그리고 보이지 않게 됐을 때 발길을 돌려놓는다.
*청풍당석 : 맑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는 좋은 곳이나 시절을 이르는 말.
토지 5권 318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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