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글쓰기/토지 속 인생이야기

12 길상과 어린 옥이의 첫 대화

밭알이 2022. 6. 6. 23:18

  그곳은 처마 밑이었는데 계집아이 하나가 벽 쪽에 등을 바싹 붙이고 앉아 있었다. 낙수에 패여 땅이 움푹한 곳에 괴다가 흐르곤 하는 빗물에 연방 생기고 꺼지고 하며 흐름을 따라가는 거품을 계집아이는 손가락 끝으로 지우고, 지우곤 하는 것이다. 귀밑머리를 쫑쫑 땋아 뒷머리와 한 묶음이 된 노르스름한 머리털이 축축이 젖어 있다. 계집아이는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눈을 들다가 어른의 구둣발을 보고 차츰차츰 고개를 치올린다. 뉘한테 야단을 맞았는지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남아 있다.


  "옥아?"
  "......."
  "뭘 하고 있니."
  "아주방이."
  "오냐."
  "어째 내 이름으 알지비?"
  길상은 빙그레 웃는다.
  "옥이는 아주방일 모르겠어?"
  "응."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눈치다. 하기는 그때 옥이 눈에는 먹을 것 이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잘 아는데도?"
  "무시기, 어찌 알지비?"
  "옥인 용정에서 살았지?"
  "응, 그래 나 용정."
  갑자기 아이는 기운을 얻은 듯 눈이 활발해진다.
  "옥이 엄마는 바느질하시고."
  "아주방인 뉘기야?"
  옥이는 발딱 일어선다.
  "날 따라오면 알으켜준다."
  "어디메?"
  "맛있는 것도 사주고 얘기도 해주고."
  "우리 어망이는 어쩌구서리?"
  "아주방이도 여기 있는걸."
  여관을 손가락질한다.
  "맛있는 것 먹고 함께 돌아오는 거야."
  "으응...... 하지만."
  망설인다.
 

 "자아, 아주방이가 안고 갈 테다. 신발은 벗고, 아주방이 옷에 흙 묻으면 안 되겠지?"
  길상은 우산을 든 채 한 팔로 아일 안는데 옥이는 저도 모르게 신발을 벗고 안긴다.
  "음, 됐어."
  "아앙, 내 신발으."
  버둥거린다.
  "우산 들고 옥이 안고 아주방인 신발 들 수 없잖아? 내 나가서 예쁜 꽃신 한 켤레 사주마."
  "앙이, 어망이한테 매 맞는다 말이."
  "아니야, 아주방이 다 얘기하면 매 안 맞아."
  길상은 그냥 걸어간다.
  "우리가 돌아와서 신발이 그냥 있으면 옥인 신발이 두 켤레가 되는 거야. 누가 가져가 버리면...... 그렇지. 누구 옥이만 한 애가 줏어 신겠지? 옥이가 꽃신 얻은 것만큼 기뻐할 거 아니겠어? 안 그래?"
  

  옥이는 비로소 안심이 된 듯 길상의 어깨를 잡는다. 따뜻한 아이의 체온과 심장 뛰는 소리가 전해온다.

 


                                                                                             토지 5권 201쪽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