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었던가. 육도천의 시뻘건 흙탕물 위로 숨바꼭질하듯 떠내려가던 바가지 한 짝이 있었지. 숨바꼭질하듯 떠내려가던 바가지 한 짝이 부어오른 송장의 배로 착각이 된다.
'이눔우 자석아 송장이 다 돼가는 나를 여기 떠메다 놓고 죽는 마당에 호강을 시키겠다 그 말가? 애라 아서라. 참말로 멋대가리 없는 짓이다.'
죽음 직전의 윤보 목소리다.
'니는 모른다. 니는 몰라. 하늘을 쳐다보고 뫼까매귀 소리를 들으믄서, 야 이놈아아야 방구석에서 죽는 것보담, 죽으믄서 계집새끼 치다보믄서 애척을 못 끊는 불쌍한 놈들보다 얼매나 홀가분하노.'
'허허 이 사람아. 그만 지껄이게. 죽기는 왜 죽어.'
김훈장이 말을 막았다. 몸에서 피비린내 땀내음이 풍겨왔으나 윤보의 눈은 맑았고 빛이 있었다.
'생원님, 입도 흙 속에 들어가믄 썩어부릴 긴데, 시부리는 것도 살아 있일 적의 낙이 아니겄소? 안 그렇십니까? 아무것도 없는 기라요, 저, 저것 보이소. 피냄새를 맡고 뫼까매귀가 따라 안 옵니까? 사램이 어리석어서 겁을 내는 기라요. 참말이제, 옛적 사람들이 얼어 죽은 구신 홑이불이 웬말이요, 굶어 죽은 구신 배맞이밥이 웬일이냐 하더마는 총 맞어 죽은 구신 무덤 지어 머 하겄십니까? 저 배고픈 뫼까매귀가 뜯어 묵는 기이 제격 아니겄십니까? 내가 죽으믄 저 까매귀놈이 파묵을 기고 저 까매귀 놈이 죽으믄 또 버러지들이 파묵을 기고요. 육신이란 본시부터 그런 거 아니겄십니까? 허허어 그거를 모른다 말입니다.'
출혈이 심하여 새파래진 곰보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있었다. 길상은 추한 평소의 그 얼굴이 부처님같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따신 구들막에서 요 깔고 이불 덮고 자석들이 울고...... 자석들이 울고 큰 생이(상여)에 댕그렇기 누워서...... 상두가를 들으믄서 명정 공포가 바람에 펄럭이믄서 아아아, 그기이 아닌 기라요, 육신에 속아서 사람은 죽는다꼬 생각하는 기라요. 불쌍한 인생들, 나는 죽는 기이 아입니다. 가는 기라요. 육신을 헌 옷같이 벗어부리믄 그만인데, 내사 마, 헐헐 날아서 가는 기라요.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기라요. 거기 가믄 양반도 없고 상놈도 없고 부재도 없고 빈자도 없고 자석 잃은 부모도 없고 왜놈도 조선놈도 없고...... 그랬이믄 얼매나 좋겄소? 그라믄 나는 콧노래나 부르믄서 집이나 지을라누마요.'
- 천심으로 살다가 천심으로 떠난 사람이다. 송선생은 유생들의 자결을 꽃잎이 지는 것 같고 설원의 한 마리 사슴 같다 했으나 어찌 윤보 목수 죽음만 할까. 웃으며 갔다. 참으로 그는 의인이었다.
* 길상이의 입을 빌려 작가가 얘기하고 있다. '죽었다'는 한 마디 전하는 말로 윤보의 죽음을 알린다, 뜬금없는 알림에 의문이 생긴다. '어찌 죽었을까?' 얽매임 없이 자유로우면서도 행동이 뚜렷했던 모습. 그 인생의 끝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험한 세상 몸도 생각도 묶인 것 없이 살았다. 살아가는 가운데 인생을 배우고 자연스러운 마음으로 인생을 채우고, 그래서 '천심으로 살은 사람'이다.
토지 5권 212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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