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관은 자갈이 한없이 깔려 있는 강변이자 관수의 처가, 울타리 없이 마당 구실을 하고 있는 곳을 바라본다. 여러 날 비를 보지 못한 강변 자갈 위의 햇볕은 봄이지마는 뜨겁게 느껴진다. 쇠가죽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어리 속에 병아리가 삐약거리고 아랫도리를 벗은 아기가 자갈밭을 뒤뚝거리며 걸어가고 다람쥐같이 젊은 여자 하나가 달려 나오더니 아기를 안고 도망치듯 부엌 쪽으로 뛰어간다.
하얗게 바래어진 자갈밭은 백정네 인생처럼 살풍경하다. 마을을 흘러 다니며 가락을 뽑는 광대들의 그 한 맺힌 가락 하나 없이, 햇볕에 타고 있는 쇠가죽처럼 핏빛에 얼룩진 백정네 인생이 거기, 자갈밭에 굴러 있다.
"나무관세음보살."
혜관의 염불 소리였다. 관수의 눈이 희번득인다. 머리 골이 울툭불툭한 혜관의 옆모습을 쏘아본다.
"동학당한테 염불은 무신, 소 때리 잡는 기이 업인데 부처님 은덕을 입을 기든가? 극락왕생할 리도 없고."
어조나 음성이 매우 불손하다. 혜관은 퉁거운 고개를 비틀 듯하며 관수를 쳐다본다. 피시시 웃는다. 관수는 제 처자에게 동정한 혜관이 미웠던 것이다. 그 감정은 관수 나름의 제 처자에 대한 연민이다.
'코 하나에다가 눈까리는 두 개 있고 아가리는 하나, 남하고 어디가 다르노. 다를 기이 머 있노 말이다. 다 같은 사람인데 머가 불쌍타 말고. 불쌍할 것 한 푼 없다고. 다 같은 사람 새끼 아니가.'
"그릇이 크다 보면 빌어먹어도 빌어먹는다는 생각은 아니할 것이며 대덕이 되다 보면 고기를 먹어도 살생계를 아니 생각할 것인즉, 사람백정이건 소백정이건 낯을 가려서 뭘 하겠나? 거지, 소백정, 갖바치 할 것 없이 시혜를 받는 편은 거지를 거지로 생각할 것이요, 소백정을 소백정으로 생각할 것이요, 갖바치를 갖바치로 생각할 것이나 심신을 바쳐 만백성을 도우고저 뜻을 세운 사람이면 일국의 제왕이건 다리 밑의 걸인이건 추호 다를 것이 없느니......"
혜관은 자못 엄숙한 낯빛으로 관수를 나무란다. 백정의 딸인 아내와 백정의 손자인 아들에 대한 연민이 관수의 심사를 일그러지게 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뜻이야. 그런지 모르겄소만 머, 그릇이 크믄 얼매나 크겄십니까. 산간벽촌의 매 한 마리가 붕새 꿈을 꾸겄십니까?"
여전히 반항적이다.
"하하핫...... 그릇 크기를 말한 달 것 같으면 피장파장이지 뭐. 우리끼리는 싸우지 말자구."
혜관은 쉽게 타협의 기색을 나타내 보이며 교활하게 씨익 웃는다. 힐끗 쳐다보는 관수 눈에 노여움은 없었다.
"그런데 시님은 어쩌실랍니까?"
얼굴을 찌푸리며 혜관을 비스듬히 바라본다.
"뭘?"
"오늘 밤은 어디서 주무시겄는지 그 말씸입니다."
"잘 곳이 없으면 길바닥에 자면 되는 게야. 비 안 오시면 하늘은 천장이지. 안 그런가? 명색이 운수의 몸, 잠자리 걱정을 한대서야."
잰다.
"백정네 집은 어떻소."
"나쁠 것 없지이--."
어미를 뽑았으나 혜관의 눈알이 빙글빙글 돈다. 일갈하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누르는 모양인데 그러나,
"벼룩 같은 놈아!"
삿대질을 하는데 법의 소매가 마구 춤을 춘다.
"이 노래미 창자야!"
까까중머리가 흔들린다. 얼굴이 시뻘겋다.
"이놈아! 그따위 배짱 가지고 평생 백정질이나 해 먹어라! 이놈아! 그래 이놈아! 그렇기 비위를 못 색일 양이면 백정 딸을 왜 얻었어!"
관수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시님!"
관수는 혜관 앞에 꿇어앉는다.
"잘못했십니다. 한 분만 용서해주십시오. 지도 앞으론 그런 생각에서 이겨보겄십니다."
저녁상은 성찬이었다.
토지 7권 59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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