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 7

3부 4편 긴 여로

묵직한 몸집에 사십이 넘은 근화방직회사 사장인 황태수가 임명빈 집 앞에 와서 하인을 부른다. 얼마 안 있어 임명빈의 아내 백씨가 황급히 나온다. 이 집을 덮쳤던 3.1 운동의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지 십 년, 평탄한 일상과 안정된 중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이다. 황태수가 임명빈을 찾아온 것은 계명회 회원 모두가 검거된 사건 때문이다. 서의돈을 필두로 열대여섯 명이 체포되었는데, 간도의 김길상도 체포됐다. 길상은 용정촌 공노인이 경영하는 여관에서 서의돈과 만난 자리에서 함께 끌려온 것이다. 황태수에게는 거의가 친구며 후배들이다. 오래지 않아 임명빈을 만나 사건의 대략을 상의하는데, 황태수는 임명빈의 위치가 구애될 것이 없으니, 임명빈에게 재량껏 뒷바라지를 요청하며 봉투 하나를 꺼낸다. 임명빈은 황태수..

23 서희와 조준구의 최종거래

"집은 얼마에 내놓으셨지요?" 서희의 침묵이 깨어졌다. "집을 내어놓다니?" "......." "집문서는 언제든지 내줄 수 있고 명의변경도." "안 파시겠다, 그 말이구먼." "그, 그렇지." "그러면 만날 필요가 없지요." "굳이 그렇다면야," "굳이가 아니에요!" 서희 눈에서 불덩이가 떨어지는 것만 같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필요한 돈은 오, 오천 원인데," "오천 원에 내놓으셨군요." "......." "서류는 가져오셨나요?" "가, 가지고 있지." "유모." "예, 마님." "안방에 가서 머릿장 속에 있는 푸른 보자기를 가지고 오시오." "네." 유모가 나간 뒤, "고맙네, 고마워." 서희는 남쪽으로 트인 창문에 눈을 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유모가 나타났다. 서희는 지폐 다발을 내민..

2부 5편 세월을 넘고

밤이 저물고 길상은 자리에 쓰러진 후 얼마쯤 지나 눈을 뜬다. 부신 눈에 흰 버섯 같은 두 개의 얼굴이 보인다. 아내와 둘째 아들, 생후 육 개월 된 윤국의 잠든 얼굴이다. 길상은 유모 곁에서 꼼짝 않고 잠들었을 큰아들 환국이를 생각한다. '하나는 내 목을 감고 둘은 각각 내 한 팔씩을 감고, 그러면 나는 꼼짝할 수 없지. 꼼짝할 수 없구말구.' 답답하다. 서희는 금년은 아니어도 명년에는 돌아갈 것이다. '내가 왜 거길 가나. 뭣하러 돌아가나.' 길상의 마음은 복잡하다. 지금까지,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만은 길상은 타인이었다. 오 년 동안, 서희가 독단으로 일을 진행해왔었다. 서희는 서희대로 얼마나 외로웠을 것인가. 정체 모른 근심이 서희를 어지럽히고 있다.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으로 입술을 굳게 다문다. '..

19 길상, 서희와 봉순이의 만남

불이 환하게 비쳐 나온 서희 방을 향해 길상은 다가간다. 방엔 팽팽하게 불빛이 들어찬 것 같고 넘쳐서 굴러 나올 것만 같은 긴장감을 길상은 느낀다. 신돌 아래서 기침을 한다. 그리고 방 앞에 가서, "들어가도 좋소?" "네." 짤막한 서희의 대답이다. 방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봉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방님, 오래간만이오." 조용한 음성, 조용한 몸가짐, 역시 봉순은 기생이었다. 서희는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래간만이군. 그간 별일 없었겠지?" 길상은 엄청나게 변모한 봉순에게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별일이 없었느냐는 말도 실수였고, 봉순은 배시시 웃었다. "별일이 왜 없었겠습니까?" 길상도 실소한다. "앉지." "네." 비로소 길상은 서희에게 눈길을 돌린다. "속이 안 좋다고 했는데 괜찮소?..

18 서희와 봉순이의 해후

"그건 그렇고, 길상이는 지금 이곳에 있지 않소이까?" 혜관은 비로소 말을 중단하고 기화에게 재빠른 시선을 던진다. "서방님께서는 회령 나가셔서 안 계시오. 내일께나 오실는지요." 기화의 머리가 앞으로 확 수그러지고 혜관은 파리 잡아먹은 두꺼비처럼. 혜관이나 기화가 다 같이 예상했던 대로다. 그러면서도 충격이었다. 능글맞은 혜관도 숨이 막히는 듯 짓눌린 한숨이 가느다랗게 새어 나왔다. "그러면은 스님께선 별채에 가셔서 쉬시겠소?" 서희가 침묵을 잡아젖혔다. "쉬기보담 허기부터 달래야겠소." 혜관은 얼버무린다. "네. 저녁을 곧 올리도록 하겠소. 봉순인 나랑 함께......." "네." 기화 얼굴은 온통 눈물에 젖어 있었다. 혜관이 부산스럽게 나간 뒤, "애기씨!" "응." 서희 눈에 처음으로 눈물이 핑 ..

2부 4편 용정촌과 서울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터였지만 용정촌 역두에서부터 최서희의 콧김이 세다는 것을 혜관과 기화는 실감하며 걸음을 내딛는다. 혜관 뒤를 조르르 따라가는 기화는 불안전해 보인다. 기화는 오소소 떨며 한기를 느끼듯 마음이 추운 것이다. 혜관과 기화를 별채에 안내하라 일러놓고 서희는 생각에 빠져든다. 봉순아! 부르며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서희는 그리운 정을 손아귀 속에서 뭉개버린다. 확고부동한 권위의식이 잠시 동안 거칠었던 숨결을 잠재워준다. '하인과 혼인을 했다 해서 최서희가 아닌 것은 아니야. 나는 최서희다! 최참판댁 유일무이한 핏줄이다!' 권위의식의 깊은 곳으로 빠져드는 그것은 서희의 불도 살라 먹으려는 무서운 집념이다. '오래간만이군, 봉순이.' '애기씨!' 서희의 손은 싸늘..

2부 2편 꿈 속의 귀마동

자그마한 몸집의 윤이병이 대문께에 서 있다. 송장환을 찾아왔는데 멍청한 모습이다. 강가로 나가더니 한 숨을 쉰다. 누이가 집에서 도망을 와서 돈 마련해 주길 청한다. 윤이병은 거짓말을 했다. 삼 년 전, 예배당에 나가면서 알게 된 애인의 집안이 망하기 시작했다. 아비가 투전에 재미를 붙여 가산을 탕진한 끝에 딸을 술집에 팔아먹은 것이다. 그 후 여자는 어떤 사내가 몸값을 치르고 빼내서 해삼위로 갔는데 여자는 도망을 쳐서 윤이병을 찾아왔었다. 사나흘 후 사내가 들이닥쳐 여자를 앗아갔다. 지금 비슷한 일이 또 생긴 것이다. 그 사내가 바로 김두수요, 여자의 이름은 심금녀. 해는 서쪽 편으로 기울고 김두수는 같은 마차를 타고 가는 나그네와 얘기를 나눈다. 나그네는 왼편 귀 근처로 해서 입술 가까이까지 푸르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