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터였지만 용정촌 역두에서부터 최서희의 콧김이 세다는 것을 혜관과 기화는 실감하며 걸음을 내딛는다. 혜관 뒤를 조르르 따라가는 기화는 불안전해 보인다. 기화는 오소소 떨며 한기를 느끼듯 마음이 추운 것이다.
혜관과 기화를 별채에 안내하라 일러놓고 서희는 생각에 빠져든다. 봉순아! 부르며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서희는 그리운 정을 손아귀 속에서 뭉개버린다. 확고부동한 권위의식이 잠시 동안 거칠었던 숨결을 잠재워준다. '하인과 혼인을 했다 해서 최서희가 아닌 것은 아니야. 나는 최서희다! 최참판댁 유일무이한 핏줄이다!' 권위의식의 깊은 곳으로 빠져드는 그것은 서희의 불도 살라 먹으려는 무서운 집념이다.
'오래간만이군, 봉순이.' '애기씨!' 서희의 손은 싸늘하다. 기화의 울음은 목구멍에서 아래로 심장으로 내려가 응어리진다. 서희가 길상이와 혼인했음을 안다. 시새움도 일지 않았고 그리움도 사라진다. 혜관과의 인사치레 대화가 끝나고 혜관은 자리를 옮긴다. 그제사, 서희 눈에 처음으로 눈물이 핑 돈다. 드디어 말아 놓았던 지나간 세월은 풀어지고 연못가 그 자리로 돌아온 서희와 봉순이는 한 사내를 의식 밖으로 몰아내 버린다.
길상은 고독하다. 고독한 결혼이었다. 한 사나이의 자유는 날갯죽지가 부러졌다. 사랑하면서, 살을 저미듯 짙은 애정이면서, 그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던 애기씨, 최서희가 지금 길상에게는 쓸쓸한 아내다. 피차가 다 쓸쓸하고 공허한가. 역설이며 이율배반이다. 그 콧대 센 최서희는 어느 부인네 이상으로 공손했고, 지순하기만 하던 길상은 다분히 거칠어졌다. 시기와 조롱을 면전에서는 교묘히 감추는 뭇시선 속에 상처받기론 마찬가지다. 그 상처를 서로 감추고 못 본 척한다. 왜 드러내 보이고 만져주고 하질 못하는가.
국밥집 월선옥에 길상이 들어서는데, 집을 신축할 때 모여 왔었던 일꾼들이 있어 한 잔씩 술을 나눈다. 일꾼들이 나간 후 월선에게서 봉순이 기생됨과 죽은 정한조의 아들 소식을 듣는다. 술 냄새가 역겹다. 온 정신을 가지고 만나볼 배짱이 없는 자신에게 역겨움을 느낀다.
서희 방에 들어서니 봉순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길상은 엄청나게 변모한 봉순이에게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길상의 시선이 서희에게 옮겨지고 진주 얘기를 조금 나눈다. 모두 외양은 평이하다. 다 같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 않았다. 옛날 상태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세 사람의 노력이 있을 뿐이다.
무성한 구레나룻이 희끗희끗한 오십에서 육십을 바라보는 늙은이가 소년 하나를 데리고 용정촌 장터를 향해 걸어온다. 강포수와 강두메, 공 노인과 물건 거래를 얘기하고, 강포수는 강두메를 맡긴다.
분단장을 끝낸 기화는 서의돈 머리맡에 살포시 앉았다. 기화는 전주로 내려가려 한다. 서의돈은 증오심이 일어나지만 연거푸 술잔을 기울이더니 잔소리는 일절 없다. 그리고 종내 전주에는 아니 가겠다는 말을 기화는 하지 않았고 서의돈 역시 가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서의돈은 임역관을 만나 조준구가 땅을 잡히고 빚을 냈다는 소문을 묻는다. 공가 성을 가진 노인이 싼 이자로 대봉 하려 한다는 얘기를 한다. 임역관은 조준구에게 공노인 얘길 흘린다. 공노인 숙소에 기화가 찾아오는데, 조준구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정한조의 아들, 석이와 같이 왔다. 석이는 조준구 집에 들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임역관이 공 노인과 함께 조준구 집에 왔다. 얼굴에 웃음을 띠고서 조준구는 그들을 맞이한다. 공 노인은 비굴할 정도로 공손하고 조준구는 거만스럽다. 임역관은 그 모습에 미소를 머금고 속으로는 냉소한다. 이제 거래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공 노인의 모습은 돈을 꾸어주는 자신을 은근히 과시하고 조준구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다.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 조준구는 순간 보잘것없는 이 늙은이의 실속이 대단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공 노인은 담비와 녹용 장사, 금광 사업한 얘기와 과장된 연줄을 이야기하며 조준구를 들었다 놨다 한다. 욕심에 눈이 어두우면 제 손가락으로 제 눈을 찌른다고 임역관은 공 노인과 얘기를 나누며 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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