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저물고 길상은 자리에 쓰러진 후 얼마쯤 지나 눈을 뜬다. 부신 눈에 흰 버섯 같은 두 개의 얼굴이 보인다. 아내와 둘째 아들, 생후 육 개월 된 윤국의 잠든 얼굴이다. 길상은 유모 곁에서 꼼짝 않고 잠들었을 큰아들 환국이를 생각한다. '하나는 내 목을 감고 둘은 각각 내 한 팔씩을 감고, 그러면 나는 꼼짝할 수 없지. 꼼짝할 수 없구말구.' 답답하다. 서희는 금년은 아니어도 명년에는 돌아갈 것이다. '내가 왜 거길 가나. 뭣하러 돌아가나.' 길상의 마음은 복잡하다. 지금까지,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만은 길상은 타인이었다. 오 년 동안, 서희가 독단으로 일을 진행해왔었다. 서희는 서희대로 얼마나 외로웠을 것인가.
정체 모른 근심이 서희를 어지럽히고 있다.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으로 입술을 굳게 다문다. '이미 내디딘 걸음이 비틀거려서는 안 된다.' 서희에게는 모든 일이 뜻대로 어김없이 아니 예상 이상으로 된 것이 사실이다. 다만 마무리가 남아 있을 뿐, 자식 둘을 앞세우고 날면 된다. 그런데 왜 이리 허한가. 그간 외면해 왔지만 이제는 외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길상은 조선으로 돌아갈 것인가. 두 자식의 끈질긴 핏줄을 설마 외면할까. 다짐했으나 대단히 자신 없기만 하다.
길서 상회 댁 대문을 들어서면서 공 노인은 길상을 찾는다. 하얼빈으로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하인의 대답이다. 방으로 들어갔을 때 서희는 윤국이를 안고 있다가 유모에게 건네준다. 공 노인의 이번 행비는 이것저것 마무리짓노라 시일을 많이 잡아먹었다. 공 노인은 삼 보따리 같은 무명 보자기를 끌러 서류뭉치를 꺼낸다. 진주에서 지낼 집문서다. 서희는 서류를 말없이 들춰보고 있고 공 노인은 허탈한 상태로 멍하니 쳐다본다. 이제 일이 끝났다! 사오 년 동안 조선을 내왕하며 미치듯 몰두했다. 마지막 보따리를 넘기고 난 지금 노쇠한 자기 육신을 느낀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별안간 최서희는 소리 내어 웃는다. 공 노인도 허허허헛 하고 웃는다. 그 웃음은 이내 멋었다.
섣달그믐 날 해거름에 초췌해진 용이가 나타났다. 홍이는 아니 오면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편지를 보내었고 벌목장으로 찾아가 사정도 해보고 했었다. 용이는 요지부동으로 산판 일을 끝내고 가겠다고 움직이지를 않았었다. 그런 용이가 이제 찾아온 것이다. 홍이의 얼굴도 영팔의 얼굴도 벌겋다. 용이의 준엄한 기운에 말 한마디 없이 굳어버린다. 방으로 들어간 용이는 월선을 내려다본다. '오실 줄 알았십니다' '산판 일을 끝내고 왔다' 서로 속삭이듯 말하고 얼굴을 묻는다. 그리고 떤다. 머리칼에서부터 발끝까지 사시나무 떨듯 떨어댄다. 용이는 월선이를 안아 무릎 위에 올린다. 내려다보고 올려다본다. 머리를 쓸어주고 주먹만큼 작아진 얼굴에서 턱을 쓸어주고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 눕힌다. 그렇게 이틀 밤을 지탱한 월선은 숨을 거두었다.
횟집에서 심부름꾼이 왔다. 길상은 횟집으로 가면서 궁금해한다.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한 사내와 마주 앉은 공 노인의 얼굴은 약간 난색을 보이고 미묘한 웃음이 지나간다. 길상은 낯선 사내를 바라본다. 낮은 음성, 웃음 섞인 말투. 구천이! 김환이다. 길상은 한순간 현기증을 느끼고 이내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치민다. 공 노인은 김개주 장수의 외 아드님이라고 우관스님의 조카 되시는 분이라고 얘기한다. 길상은 또다시 충격을 받는다. 김환은 최서희를 만나러 가도 되겠는지 길상에게 묻는다. 후안무치한 말이다. 길상은 김환의 웃는 얼굴이 누구를 닮은 것 같다. 입에 뱅뱅 돌면서 생각나지 않더니 둘째 윤국이의 웃는 얼굴과 닮았다고 얘기한다. 환이 얼굴에 경련이 인다. '당연히 그럴 게야' '윤 씨 부인은 내 어머니였으니까' 길상은 놀라 벌떡 일어났다 도로 주질러 앉는다. 취기가 밀물처럼 달려온다. 두 사내는 사흘 밤 사흘 낮을 마시고 뒹굴고 기괴망측한 시간을 보낸다. 길상은 서희를 김환에게 인사시킨다.
지난봄 하얼빈으로 해서 연해주를 거쳐 길상은 돌아왔다. 김환을 궁금해하는 서희를 데리고 나간다. 강가로 나온 길상은 서희의 손을 잡는다. 김환의 내력을 얘기한다. 강아지처럼 웅크린 채 말이 없는 서희 앞으로 강물은 달빛 아래 일렁인다. 며칠 후 길상은 용정을 떠났다.
늦더위가 가고 길서 상회는 이사를 시작했다. 이삿짐과 머슴 두 명을 데리고 공 노인이 조선을 다녀왔고 처분할 것은 모조리 처분하였다. '아버지는 왜 안 오셔요?' 환국이는 풀쑥 묻는다. 볼일 보고 온다는 말에 환국이 얼굴에 의심이 가득 차 있다. 떠나는 날 하늘은 쾌청하다. 환국이가 보이지 않는다. 다락 안에 숨은 환국이. 환국이를 찾은 서희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이다. '당신 용서하지 않을 테요, 결코!' 흐느낀다. 서희는 서두르면서도 침착하게 활시위에서 떠난 화살같이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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