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글쓰기 본보기 15

'토씨'의 예

나(유시민 작가)는 우리말의 가장 큰 매력이 토씨에 있다고 생각한다. 토씨는 뜻을 압축해서 전하는 수단이며 문장에 감칠맛이 돌게 만드는 조미료이기도 하다. 다양한 토씨를 적절하고 정확하게 쓰는 아이는 언어 능력이 뛰어난 어른이 된다. 우리말에는 다양한 주격조사가 있다. '이''가'를 많이 쓰지만 맥락에 맞추어 '은''는'이나 '도'를 쓰기도 한다. 소개팅을 하고 온 어떤 여자한테 '절친'이 이렇게 물었다고 하자. '그 남자 어때?' 대답은 네 가지가 있다. '키도 커''키는 작아''키는 커''키도 작아'. 이 네 가지 대답 모두에서 토씨가 핵심 정보를 전달한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키도 커'는 이런 뜻이다. 그 남자 돈 많고 교양 있고 직장 좋고 심지어 키도 커. '키는 작아'는 괜찮지만..

'거시기화법'의 예

다음은 '자동텐트'를 구입해 방에서 펴본 어느 네티즌이 블로그에 올린 사용 후기다. 이 글은 '거시기 화법'이라는 약점을 안고 있다. O 자동텐트를 이 가격에 구매하기는 어렵지요. 해당 가격에 만족스런 제품입니다. 일부 마무리 부분이 아쉽지만요. 일단 방에서 텐트를 쳐본 모습입니다. 약간 작은 듯하지만 나름 만족스럽지요. 텐트 안에서 보면 불빛이 새는 부분이 있어요. 박음질한 부분들인데. 이런 부분 때문에 비 올 때 제대로 방수가 될는지 의심스럽더라고요. 텐트 문을 묶어주는 끈이 하나가 짧아요. 이런저런 부분들이 아쉬운 점이 있지만 조금만 더 다듬어준다면 좋은 제품이 될 듯하네요. 그런 대로 뜻을 잘 전달하는 글이다. 그런데 이 짧은 글에 '부분'을 무려 다섯 번이나 썼다. 방송 뉴스나 시사 토론에 나와..

'단문쓰기'의 예

같은 뜻을 담아도 단문으로 쓴 글과 복문으로 쓴 글은 느낌이 다르다. 다음은 초판(1988)에서 가져온 글이다.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그 책의 첫 꼭지 첫 단락이다. 복문을 어떻게 단문으로 바꾸는지, 그리고 문장구조와 문체의 변화가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살펴보자. O 초판 글 1894년9월 어느 날, 프랑스의 참모본부 정보국은 프랑스 주재 독일대사관의 우편함에서 훔쳐낸 한 장의 편지를 입수했다. 그 편지의 수취인은 독일대사관 무관인 슈바르츠코펜이었고 발신인은 익명이었으며, 내용물은 프랑스 육군 기밀문서의 '명세서'였다. 스파이 활동의 거점인 독일대사관을 감시하고 배반자를 색출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던 참모본부는 '명세서'를 작성한 사람이 참모본부 내에 있는 자이거나, 최소한 그런 자와 가까운 연관을 ..

'일본말, 서양말 오남용'의 예

잘못 가져다 쓴 중국 글자말과 일본말, 서양말은 글을 어렵게 만들고 뜻을 흐리게 한다. 읽기가 힘들고 듣기도 흉하다. 이런 것이 들어와 있으면 문장이 쓸데없이 길어지고 운율이 무너진다. 잘 쓴 글은 말하듯 자연스러운 글이다. 다음은 내(유시민 작가)가 글쟁이가 되는 계기를 만들어준 에서 가져왔다. 가 못난 글인지 쓸 때는 몰랐다. 명문이라고 칭찬한 사람이 많아서 한동안은 우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뜻을 표현하는 데에는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문장을 제대로 쓴 글은 아니었다. 못난 곳에 밑줄을 긋고 바르게 고쳤다. 원래 글에서는 한자말과 격조사를 지나치게 자주 그리고 함부로 썼고, 일본말과 서양말 문법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고친 글이 어딘가 밋밋하고 심심해진 것 같지만 훨씬 자..

'못난 글의 수정' 예

다음은 2014년 7월 8일 국무총리가 발표한 담화문의 한 단락이다. 이것이 못난 글인지 아닌지 알아보자. 밑줄 그은 곳을 특별히 의식하지 말고 우선 눈으로 읽어보라. 그다음에는 입으로 소리 내어 다시 읽어보라. 그동안 육상에서의 사회 재난과 자연 재난을 관장하는 부서가 각각 본부조직과 외청으로 이원화되어 있고, 해상에서의 재난은 해수부와 해경으로 분산되어 있어 재난 안전을 통합적으로 기획하고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육상과 해상의 재난, 사회 재난과 자연 재난을 모두 통합하여 국가안전처로 일원화하여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철저히 책임 행정으로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안전처가 하루라도 빨리 출범해야 국민의 생명과 안전 보호를 위한 획기적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눈으로 읽어서 무슨 뜻..

'논점 일탈의 오류'의 예

'아메리카노커피를 먹어야 회의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노동자 민중과 무슨 인연이 있는지 의아하다'는 주장은 거센 풍파를 일으켰다. 온갖 이야기가 다 나왔지만 정리하면 대충 이런 것이었다. 노동자 민중과 인연이 있는 사람은 아메리카노커피를 마시지 말아야 하느냐, 믹스커피는 민중적이고 아메리카노커피는 반민중적이냐, 아메리카노커피가 미국 커피 맞냐, 시골 할아버지들도 모내기하다가 새참으로 커피 마시는데 무슨 헛소리냐, 비판의 초점은 '아메리카노커피'와 '노동자 농민'을 연결한 것이었다. 글쓴이는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끌어들이는 '논점 일탈의 오류'를 저질렀다. 당 홈페이지에 올린 글의 주제는 '유시민 공동대표의 권위주의적 생활 태도'였다. 그런데 그 문장 하나로 인해 모든 게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가 마..

'논증'의 예

유시민 작가의 독일 유학생시절 이야기다. 작가는 독일을 포함해 세계 각지에서 온 청년들과 어울려 공부도 하고 놀기도 했다. 국제금융기구 관련 세미나 주간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에 휴게실에서 뉴스를 보는데 독일 학생 둘이 논쟁을 시작했다. 한 학생은 보수적인 남부 바이에른의 뮌헨에서 왔다. 이 학생을 '뮌헨'이라고 하자. 다른 학생은 북부 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 왔다. '함부르크'라고 하자. 논쟁의 발단은 독일 사회민주당 전당대회 전야제 행사였다. 50대 당지도부 인사들이 20대 청년당원들과 테크노댄스를 추는 장면이 텔레비젼 뉴스에 나왔다. 귓바퀴에 피어싱을 여러 개 한 여성당원이 보였다. "미친 것!" '뮌헨'이 혼잣말로 욕을 했다. 그러자 '함부르크'가 물었다. "뭐가?" "저 피어싱 말이야." "저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