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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묘미'의 예 - 이외수 편

밭알이 2022. 10. 8. 23:25

O 때때로 바람의 완강한 팔뚝에 머리채를 움켜잡힌 채 한 줄로 서서 쓰러질 듯 쓰러질 듯 버티고 있는 가로수들, 이따금 날개를 접질리운 새들처럼 휴지들이 높이 솟구쳤다간 곤두박질을 치고 있었다.
O 내 잠의 막은 언제나 얇고도 희미해서 현실과 잠사이에 가로놓인 한 장의 미농지 같았다. 비록 잠들어 있는 상태라 해도 항시 잠 바깥에 있는 것들이 막연하게 잠 속에 비쳐 들어와 어른거리곤 했다.
O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한없이 풍성하게 부풀어올라 햇빛 속에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새로 따낸 목화송이를 잘 손질해서 하늘에 가득가득 쌓아놓은 것 같았다. 나는 그 푹신한 곳 깊숙이 뛰어들어 끝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고 싶었다.

O 비는 아주 지리한 소리로 땅을 적시고 있었다. 영원히 그 템포를 잃지 않고 지리하게지리하게지리하게지리하게지리하게지리하게지리하게 계속되어질 것 같았다.


O 불빛들이 비에 젖은 아스팔트 위에 흥건하게 녹아서 번들거리고 있었다.
O 요즘 남자들은 대개 가슴이 없어요. 두뇌만 있어요. 콘크리트 냄새와 쇳내만 나요. 플라스틱 냄새와 가스 냄새만 나요.
O 밤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라고 써놓고 거의 일주일 동안이나 그 뒤를 이어나가지 못한 채 파지만 수십 장씩 죽어나갔다. 부질없는 내 언어의 시체들이 하얗게 마룻바닥에 널려 있었다.
O 벽 한쪽에는 대형 캔바스가 하얗게 가슴을 비우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은빛 의식의 빙판 같았다.


O 그가 새로운 들개를 탄생시키기 위하여 희디흰 공백 위로 붓을 가까이 근접시켰을 때 그것은 모든 촉수를 긴장시키고 잠시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일순 딱 경련을 멈추면서 한치의 허트림도 없이 캔바스에 닿아서는 침착하고 정련된 곡선을 유지하며 들개의 머리와 등과 꼬리와 배와 다리들로 연결되어져 갔다.
  붓이 움직이는 동안 실내의 모든 사물들은 숨을 쉬지 않았다. 일제히 눈을 빛내며 그 붓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붓이 마침내 잠시 움직임을 멈추면 그때야 비로소 낮은 숨을 탄성처럼 발했다.


O 내 노트 속에서 수없는 소설 나부랭이들이 꿈틀거리다가는 기진해서 나자빠지는 모습이 보였다.
O 사람은 그저 돈에 묻어다니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해. 먹을 수도 없는 고깃덩어리니까 별로 반갑지도 않지. 가능하면 고깃덩어리는 말고 돈만 방 안에서 잠을 자 주었으면 하는 표정이로군.
O 그의 발 밑에는 대여섯 개의 맥주병들이 춥니? 안 추워, 나지막한 소리로 달그락거리면서 알몸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O 하늘 한 켠으로 구름이 노을에 젖은 채 기다랗게 가로누워 있었다. 새들이 해가 지는 하늘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느릿느릿 뗘내려가고 있었다.
O 나는 보았다. 거기 경건하게 완성되어져 있는 한 남자의 영혼을. 나는 오래도록 시선을 다른 데로 옮길 수가 없었다. 그 그림은 일찍이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가장 아름다운 또 하나의 세계였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의 유서이자 영혼의 목소리였다.

                                                                              <들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