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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입'의 예

밭알이 2022. 10. 3. 21:29

  소설을 읽을 때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인문교양서나 과학책 저자에게도 감정을 이입할 수 있어요. <코스모스> 1장에는 최초로 지구의 크기를 측정하는 데 성공한 인물이 나옵니다. 2,200년 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관장이었던 에라토스테네스입니다. 에라토스테네스는 몇 가지 가설과 논리적 추론, 원시적인 거리 실측, 그리고 간단한 기하학 지식을 활용해서 지구 둘레가 4만 킬로미터 정도 된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간단하게 요약해 보겠습니다.

  1. 태양은 아주 멀리 있기 때문에 태양빛은 지구 표면 전체에 평행으로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2. 하지인 6월 21일 정오 시에네라는 곳에는 수직으로 꽂은 막대기에 그림자가 없는데 알렉산드리아에는 그림자가 생기는 것으로 보아 지구는 둥글다고 보아야 한다.
  3. 하인을 시켜 거리를 측정해 보았더니 시에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약 925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4. 6월 21일 정오 알렉산드리아에 세운 막대기와 그림자의 길이를 근거로 추정해 보니 태양빛은 수직선에서 7.2도 기울어져 떨어졌다. 이는 시에네와 알렉산드리아에서 각각 수직선을 그을 경우 두 직선이 지구중심에서 만나 이루는 내각의 크기가 7도임을 의미한다.
  5. 7.2도는 360도의 약 50분의 1이므로 시에네와 알렉산드리아의 거리 925킬로미터에 50을 곱하면 지구 둘레가 될 것이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이런 방법으로 지구 둘레가 약 4만 6천250킬로 미터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현대 과학으로 정밀하게 측정한 실제 지구 둘레는 4만 192킬로미터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칼 세이건은 그 놀라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파피루스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남쪽 변방인 시에네 지방...에서는 6월 21일 정오에 수직으로 꽂은 막대기가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보통 사람 같으면 쉽게 지나쳐 버릴 관측 보고였다. 나무 막대기, 그림자, 우물 속에 비친 태양의 그림자, 태양의 위치처럼 단순하고 일상적인 일들이 무슨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으랴? 그러나 에라토스테네스는 과학자였다. 이렇게 평범한 사건들을 유심히 봄으로써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에라토스테네스가 사용한 도구라고 할 만한 것은 막대기, 눈, 발과 머리 그리고 실험으로 확인코자 하는 정신이 전부였다. 그 정도만 가지고 지구의 둘레를 겨우 몇 퍼센트 오차로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작가)는 이 대목을 읽다가 책을 엎어 두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문장들이 보여 주는 감정은 '탄복' 또는 '놀라움'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감정을 이입한 대상은 에라토스테네스가 아니었습니다. 책을 쓴 40대 중반의 스타 과학자 칼 세이건 교수도 아니었습니다. 천재 과학자 반열에 오르내린 그가 이런 수준의 지식에 감탄했을 리가 없습니다. 이 문장들이 보여 주는 감정은 소년 칼 세이건의 것입니다. 어느 책에선가 에라토스테네스가 지구 크기를 알아낸 방법을 처음 읽었을 때 소년 칼 세이건이 느꼈던 감정입니다. 어른이 된 과학자 칼 세이건이 그 감정을 <코스모스>의 문장에 담았고, 저는 그 대목을 읽으면서 '과학소년' 칼 세이건한테 감정을 이입한 겁니다.

 


                                                                                  <표현의 기술> 1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