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과 경복궁 사이에 끼어 있는 가회동의 이 판서댁에 이상현이 기식하고 있다. 대문간에서 누군가 얘기를 주고받는 것 같은 기척이더니 이상현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혜관 스님이다. 상현의 모친 염 씨의 소식을 가져왔다. 설에는 꼭 오라는 전갈이다. 혜관은 간도의 소식과 독립군의 활동상황을 궁금해한다.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상현은 화류계에 몸을 던진 봉순이, 기화의 소식을 듣는다.
환이는 의병 잡아먹는 동학군을 모으려 한다. 뭔 소린가? 두 사람은 구례와는 다른 방향으로 발을 옮겨 놓는다. 해가 서너 뼘이나 남았을 무렵 혜관과 환이는 운봉 노인이 있는 초막에 당도하였다. 화적 떼로 타락한 무리들, 일본 토벌대에 쫓겨만 다니는 허약한 선비가 이끄는 의병들을 환이는 끈질기게 추적하면서 마치 그림자처럼 그들 무리에게 달라붙어 방화살인을 감행하고 그들에게 범행을 전가하는 수법을 쓰고 있다. 이에 대해 혜관은 별로 놀라지 않았고 환이를 비난하지 않았다.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숯 굽는 사내 강쇠의 초막에 당도하였다. 아침을 서둘러 먹고, 혜관은 순창으로 떠난다. 환이는 강쇠와 같이 목기를 한 짐 씩 짊어지고 산천장으로 서둘러 움직인다. 객줏집에 짐을 풀고 시시덕거리다 밤이 깊어지자 오랫동안 쑤군쑤군 얘기를 나눈다.
다음 날 산청 장바닥이 술렁거렸다. 잡화상을 하는 일본인 집에 도둑이 들었는지 의병의 소행인지 알 수 없으나 적잖은 물건을 도난당했다는 것이다. 환이와 강쇠는 목기를 쌓아두고 엉거주춤 서 있다. 건달풍 사내들 서너 명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고, 복작거리는 장꾼들 속을 헤치고 순사는 사벨을 절렁거리고 나온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건달풍 사내들이 순사 둘레를 싸는가 싶더니 외마디 소리와 함께 사내들은 달아난다. 엎어진 왜 순사 등에 비수는 깊숙이 꽂혀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환이와 강쇠는 토벌대가 용주골 화적의 산채를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개를 넘고 있다. 혐의를 화적 떼들에게 명확하게 돌려놓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흐느끼도록 몰아대는 바람 속의 둑길을 물지게 진 석이가 부지런히 걷는다. 물에 젖은 바지 아랫도리는 강정같이 얼어서 오금을 떼어 놓을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가 날 것만 같다. 옥봉의 기화네 집 대문을 밀고 들어가 물독을 가득 채우고 뚜껑을 닫는다. 빈 물통을 덜렁거리며 석이는 길을 돌아 나섰다. 장터 옆을 막 벗어나려는 데, 송관수를 만난다. 육 년 전 가을걷이를 앞둔 그러한 날, 아래 윗마을에서 연장을 손에 든 장정들이 모였을 적에 관수는 그들 속에 끼어 있었다. 횃불을 켜든 그 무시무시했던 밤, 조준구의 행방을 결사적으로 찾은 것도 관수였다. 그 후 진주에 자리 잡고 백정 네 딸을 얻어 지내고 있다. 생활의 뿌리를 박은 듯 싶었지만 그런 것 같지 않은 점도 있다.
석이와 저녁에 만나기로 한다. 어미는 불안해하는 눈빛이고, 아들의 발소리는 멀어진다. 다음 날, 석이는 올이 굵은 무명 저고리를 입고 아주 의젓한 총각 모습이 돼 있다. 관수가 석이와 함께 강을 건너 나룻배를 내려섰을 때는 아침 해가 솟아오를 무렵이었다. 산을 지나고 개천을 지나고 구례에 당도하였다. 윤도집과 혜관을 만난다. 윤도집은 석이를 보고 정한조 아들이 우리 선을 보러 온 모양이라고 좋아한다.
윤도집은 씨아 털을 피운 민들레 같은 느낌을 주는 선비풍의 사람이다. 도집이라는 직명이 설명해 주듯 운봉 양재곤을 총수로 하여 새로 조직된 동학 별파의 중요 간부 중 한 사람이다. 관수는 다녀올 때가 있다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가 며칠 뒤 돌아온다. 석이와 돌아가기 위해 나루터에서 배를 탔다. 장사꾼 풍의 사내가 주재소가 쑥밭이 됐다고 순사 놈들을 산으로 끌고 가 옷을 벳기고 직있다고 소곤거리는데 관수 입가에 경련 비슷한 미미한 웃음이 번졌다.
기화는 소리 장인 운삼을 찾아 서울에 왔다. 운삼의 관계는 넓어서, 기화는 예상했던 것보다 나은 형편으로 지낼 수 있었다. 혜관이 찾아왔다. 혜관은 간도로 향하고 봉순이는 동행하기로 한다. 애기씨와 많은 사람들! 봉순이 마음은 고향으로 가는 것 같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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