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환하게 비쳐 나온 서희 방을 향해 길상은 다가간다. 방엔 팽팽하게 불빛이 들어찬 것 같고 넘쳐서 굴러 나올 것만 같은 긴장감을 길상은 느낀다. 신돌 아래서 기침을 한다. 그리고 방 앞에 가서,
"들어가도 좋소?"
"네."
짤막한 서희의 대답이다. 방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봉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방님, 오래간만이오."
조용한 음성, 조용한 몸가짐, 역시 봉순은 기생이었다. 서희는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래간만이군. 그간 별일 없었겠지?"
길상은 엄청나게 변모한 봉순에게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별일이 없었느냐는 말도 실수였고, 봉순은 배시시 웃었다.
"별일이 왜 없었겠습니까?"
길상도 실소한다.
"앉지."
"네."
비로소 길상은 서희에게 눈길을 돌린다.
"속이 안 좋다고 했는데 괜찮소?"
"괜찮습니다."
길상의 시선이 서희에게 옮겨진 뒤 봉순이는 자리에 앉는데 아랫도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간신히 견디어낸다. 전등이 두 개, 세 개, 네 개로 보였고 움직이지 않던 서희의 까만 눈동자도 여러 개로 엇갈려 흔들린다.
"오면서 잠시 들었는데 서울에 왔다며?"
길상의 음성이 먼 곳에서 울려오는 것 같다.
"네."
"관수가 살아 있다 하던지?"
"진주에 있어요. 얼마 동안은 숨어 있었지요."
"음......."
"한조아재 아들이, 그러니까 열아홉 살이어요. 진주서 물지게품을 팔아 사는데 고생이 말할 수 없고, 그래도 제 아버지, "
하다가 봉순은 말을 끊어버린다. 옛날로 끌어당기는 감정의 줄을 뚝 끊어버리듯이. 옛날의 말투, 옛날의 습관이 뛰쳐나올 듯 두려웠던 것이다.
"그 아이도 칼을 갈겠군, 조준구한테."
서희가 봉순이 하려는 말을 이어주듯 말했다. 길상이 중얼거린다.
"원수는 원수를 낳고 또 원술 낳고, 끝없는 놀음인가 부다......."
모두 외양은 평이했다. 다 같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 않았다. 대결도 냉전도 아니었다. 미움은 물론 아니었다. 옛날 상태로 돌아기지 않으려는 세 사람의 노력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자기 감성에 가장 냉혹한 사람은 최서희였다.
토지 7권 197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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