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은 말을 뚝 끊고 고개를 숙인다. 조는가 했더니 자맥질하던 해녀같이 얼굴을 치켜세운다. 몽롱한 취안이다. 씩 웃는다.
"최서희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어? 흥, 천하를 주름잡을 텐가? 어림도 없다!"
어조를 싹 바꾸며 반말지거리다. 장승처럼 서 있는 서희 얼굴에 경련이 인다.
"넌 일개 계집아이에 지나지 않단 말이야! 거 꿈 하나 거창하지. 아무리 돼지 멱따는 소리 질러봐야 이곳에 구종별배도 없고 으음, 있다면 왜놈의 경찰이 있겠구먼. 흥, 그 새 뼈가지 몸뚱이로 어쩔 텐가? 난 지금이라도 널 희롱할 수 있어. 버릴 수도 있고 흙발로 짓밟을 수도 있고 가는 모가지를 비틀어 죽일 수도 있다 그 말이야. 나 술 안 취했어. 내 핏속엔 술이 아니고오, 음 그렇지 그래. 대역죄인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게야. 아니 그보다 식칼 들고 고갯마루를 지키는 산 도둑놈의 피가 흐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니겠어?"
"이놈아!"
드디어 서희 입에서 욕설이 굴러 나왔다.
"네에, 애기씨 말씀하시오."
"너 나를 막볼 참이구나."
"네에. 막보아도 무방하구 처음 본대도 상관없소이다. 십여 년 세월 수천수만 번을 보아와도 늘상 처음이었으니까요."
길상은 끼들끼들 웃다가 또 고개를 푹 숙인다.
서희는 망토를 벗어던지고 방바닥에 굴러 떨어진 꾸러미를 주워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그것을 길상의 얼굴을 향해 냅다 던진다.
"죽여버릴 테다!"
서희는 방바닥에 주질러 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어릴 때처럼, 기가 넘어서 숨이 껄떡 넘어갈 것 같다. 언제나 서희는 그랬었다. 슬퍼서 우는 일은 없었다. 분해서 우는 것이다.
"난 난 길상이하고 도망갈 생각까지 했단 말이야. 다 버리고 달아나도 좋다는 생각을 했단 말이야."
철없이 주절대며 운다.
"그 여자 방에 그, 그 여자 방에서 목도리를 봤단 말이야, 으흐흐흐흣......"
길상의 눈동자가 한가운데 박힌다.
"그 꾸러미가 뭔지 알어? 아느냐 말이야! 으흐흐...... 목도리란 말이야 목도리."
하더니 와락 달려들어 나둥그러진 꾸러미를 낚아챈다. 포장지를 와득와득 잡아 찢는다. 알맹이가 밖으로 나왔다. 그것을 집어 든 서희는 또다시 길상의 면상을 향해 집어던진다.
"헌 목도린 내버려! 내버리란 말이야! 흐흐흐...... 으흐흐흣......"
길상은 어떻게 할 바를 모른다. 술이 깨고 정신이 번쩍 들지만 무릎 위에 떨어진 목도리를 집었다간 불에 덴 것처럼 놓고 또다시 집었다간 놓고 하면서 서희의 울음을 그치게 할 엄두를 못 낸다. 드디어 그는 목도리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고서 마치 훔쳐서 달아나는 도둑처럼 방을 뛰쳐나간다. 제 방으로 돌아온 길상은 우리 속에 갇힌 짐승처럼,
"미쳤을까? 애기씬 미쳤을까?"
중얼거리며 맴을 돈다.
*구종별배 : 말구종에서 나온 말로, 벼슬아치나 양반을 모시고 다니던 하인.
토지 6권 125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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