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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감(말의 맛)'의 예

밭알이 2022. 4. 17. 10:02

  다음은 지난 2014년 12월 19일,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한 헌법재판소 결정문 결론의 한 단락이다. 밑줄 그은 부분을 잘 살펴보기 바란다.

                                                        O 정견의 자유를 누리는 정당이라면, 자신들의 대안을 통해 현재보다 진일보한 국가공동체의 미래상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지배적인 관념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현행 헌법상의 민주적 기본 질서에 포함된다고 인정되는 내용들이라 하더라도 그에 대한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여 사회적 논의를 시도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한 공당의 성실한 자세로서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라면 어떤 정당이 정치적 견해를 개진하는 과정에서 다소간 민주적 기본 질서와 상치되는 주장을 제시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즉, 민주적 기본 질서의 내용으로 간주되는 개별 요소들에 대한 정치적 논의와 비판의 자유는 보장된다. 이는 우리 사회의 건전한 토론과 정치적 숙고를 촉발시키고, 보다 진전된 정치적 목표를 형성하여 이것이 우리 공동체 안에서 널리 공유될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압도적 다수 의견으로 채택한 결정문은 공연히 어려운 한자말, 서양말과 일본말의 수동형 문장으로 가득하다. 추상명사까지 '들'을 붙여 쓸데없는 복수형을 만들었다. 문장의 운율을 고려한 흔적은 아예 없다. 특히 잘못 쓴 세 군데에 밑줄을 그었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정당이 이른바 '민주적 기본 질서'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행위를 '허용'하고 '존중'해야 하는지 여부다. 정당이 그런 일을 하는게 '가능'한지 여부가 아니다. 헌법재판관들은 다만 '가능하다'를 '허용할 수 있다'거나 '허용해야 한다'는 뜻으로 썼을 뿐이다. 뜻을 전하는 데에는 그럭저럭 성공했지만 제대로 된 말은 아니다. 게다가 '정치적 숙고를 촉발시키고'라는 말은 '아름다운 꼬락서니'만큼이나 어색한 표현이다. '숙고'는 신중하고 깊게 사유하는 것이다. 신중하고 깊은 생각은 '접촉하여 폭발'하거나 '자극하고 재촉'해서 되는 게 아니다. 
  헌법재판소 결정문의 '거시기 화법'을 제거하고 궁합이 맞지 않는 단어를 적절한 다른 단어로 교체해 문장을 말하듯 자연스럽게 고쳐보았다. 말하는 뜻은 똑같지만 고친 글이 훨씬 편하게 읽을 수 있고 뜻도 더 분명하다.

O  정치사상의 자유를 누리는 정당이라면 진일보한 국가공동체의 미래를 지향하면서 현재의 지배적인 관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신의 대안을 내세울 권리가 있다. 현행 헌법의 민주적  기본 질서에 포함되는 내용이라도 그에 대한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여 사회적으로 논의하는 행위를 허용하고 그것을 공당의 성실한 자세로 존중해야 마땅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떤 정당이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민주적 기본 질서와 충돌하는 주장을 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는 정당이 민주적 기본 질서의 내용으로 간주되는 개별 요소를 비판하고 정치적으로 논의할 자유도 보장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그들이 형성한 더 진전된 정치적 목표를 공동체 안에 널리 공유하고 우리 사회의 건전한 토론과 정치적 숙고를 북돋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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