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실패에서 시작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양을 둘러싼 모험'을 탈고한 뒤 약 3년 동안 장편소설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지쳤기 때문이었다. 단편과 에세이, 번역물을 쓰며 시간을 보낸 후 1984년 8월 본격적으로 소설 집필에 착수했다. 완전히 다른 제재를 사용한 새로운 타입의 소설을 막연하게 구상했다. <문학계>에 게재하기 위해 썼던 '마을과 그 불확실한 벽'이라는 중편소설에 살을 좀 붙여서 재조명해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마을과 그 불확실한 벽'이라는 소설은 하루키에게 무리였다. 그에게 시기상조의 테마였고, 스스로도 능력이 부족했음을 인정한다. 이 책은 활자화되며 하루키에게 실패가 돼버렸다.
하루키는 '마을과 그 불확실한 벽'을 새로 고쳐 써서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것으로 만들어보고 싶어 했고, 작품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 이야기를 보편화시키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고민은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이야기를 병행해서 써나가다가 마지막에 하나로 합치는 구상'을 하게 됐다.
이 시기에 하루키가 쓴 여섯 권의 장편소설 가운데 이 소설을 쓰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자신이 가진 실력보다 한 단계 정도 높게 설정해 놓고 쓰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소설에 대한 하루키의 소감이다.
"이 소설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나는 이 소설을 시종일관 긴장감을 가지고 써내려갔고, 쓰는 동안에는 혼신의 힘을 다했다. 또 다 쓰고 난 후에는 어떤 느낌도 전해져 왔다. 그 느낌, 뭔가를 손에 쥐었다는 그 감촉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내 몸속에 남아 있다."
이 정도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의 성장 소설쯤 되겠다. 하루키의 점프-업 소설이다. 책 말미에 있는 '내 작품을 말한다'로 인해 독자는 어떤 이입보다는 일정 거리를 두고 '작품'을 보게 되는 쪽으로 감상하게 된다. 우습고 묘하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주인공, '나'가 얘기하는 '세계의 끝'이 있다.
"의식의 밑바닥에는 본인에게는 감지되지 않는, 그러니까 핵과 같은 것이 있어. 내 경우엔 그것이 한 마을이야. 마을에는 한 줄기의 강이 흐르고 사방이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그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나갈 수 있는 것은 일각수뿐이지. 일각수들은 사람들의 자아나 에고를 빨아들여, 그러니까 종이처럼 빨아들여 마을 밖으로 날아가. 그래서 마을 안에는 자아도 없고 에고도 없지. 나는 그런 마을에 살고 있는 거야. 그런 얘기야..."
그리고 또 하나의 이야기는 극단적 정보화를 추구하는 사회를 배경으로 덫에 걸린 '나'가 지하세계를 모험하여 결국, 세계의 끝에 다다르는 소설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쓰는 비결과 원칙.
"풀숲 속의 토끼를 좇듯 자신 안의 본능을 좇아가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선가 괴로움으로 뒤범벅이 된 아이디어가 퐁 하고 튀어나온다. 이것을 놓치지 않고 꽉 움켜쥐는 것이야말로 소설을 쓰는 하나의 비결이 아닐까 싶다."
"흠이 잡힌 것은 다시 고쳐 쓴다는 것이 나의 기본 방침."
* 두 가지의 색다른 이야기를 번갈아 쓴 책이라고 해서 두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이 책은 전체 667쪽이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459쪽, '세계의 끝'이 208쪽이다. 아마도 '마을과 그 불확실한 벽'을 새로이 쓴 글이 '세계의 끝'일 테고 이 책의 30 퍼센트 정도 분량이 된다. 중편소설에서 짧은 장편소설로 바뀌었다.
* '노르웨이의 숲'은 1987년 38세에,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1985년 36세에 썼다. '한시라도 빨리 작가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확립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꽉 차있었던 시기'의 끝에 나온 책이 이 작품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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