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갑은 연추에 오면 정호네 집에서 지낸다. 옛날 김훈장처럼.
"저기 오누만."
주갑의 눈은 당장 새우눈이 되고 눈 가장자리에 잔주름이 왈칵 모인다.
"어련할라구요?"
아이 엄마는 빨래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일곱 살 먹은 사내아이와 다섯 살짜리 계집애가 손을 흔들며, 마치 바람개비처럼 달려온다.
"할아버지이! 할아버지!"
주갑은 양 무릎을 벌리고 주저앉는다. 날개처럼 긴 팔을 벌린다. 계집아이가 총알같이 달려와 품에 안긴다. 사내아이는 목에 팔을 감고 늘어진다.
"아니고매, 할아부지 엉덩방아 찧겄이야."
아이들은 킬킬거리고 새처럼 재잘거린다.
"밥 잘 먹고 잘 있었지라?"
"네!"
두 아이를 앞으로 몰아 머리를 쓰다듬는다.
"할아부지 이번엔 일찍 왔네?"
"암, 숙이가 보고 접어서 한달음에 갔다 왔제잉."
"이번엔 얼마나 오래 계실 거예요?"
사내아이가 묻는다.
"금매, 할아버지도 오래 있고 접는디, 일이 생기면 또 가야 안 허겄남?"
"할아부지 없음 심심해."
주갑은 계집아이 볼에 입 맞추며,
"그려, 종훈이는 핵교 갔다 왔냐?"
"네!"
아이들은 주갑을 좋아한다. 동무들보다 주갑이 더 잘 놀아주었고, 또 긴 겨울엔 밖에 나가 놀 수 없기 때문에, 주갑은 다정한 할아버지면서 동무였다. 피리며 탈이며 연을 만들어주었고 노래도 불러주었고 들판에 나가면 뜀박질도 함께했다. 할아버지가 없음 심심하다 했는데 주갑이 역시 아이들이 없으면 쓸쓸해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주갑이 길 떠난 뒤 눈이 빠지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망태 속에 넣어오는 사탕이며 과자 때문이다. 명절을 앞두었을 때는 더욱 초조하게 아이들은 그를 기다리는데, 그때는 때 묻은 망태 속에 아이들의 옷이며 신발 같은 것을 마치 보물처럼 넣어가지고 주갑은 돌아오는 것이다.
토지 12권 171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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