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던지, 부친이 몸져누운 일이 있었다. 환이는 밤을 새워 부친의 시중을 들었다. 모두가 다 잠들었을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이었다.
"환아."
"예, 아버님."
"너 대장부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촛불에 그늘진 얼굴을 환이 쪽으로 돌리며 느닷없이 물었다.
"아버님 같은 분을 대장부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대장부라는 것은 허욕이니라."
"예?"
"나도 내 자신을 만백성 구하려고 창칼을 들고 나선 사내, 그런 사내 중의 한 사람이거니 자부하고 싶다. 때론 그렇게 믿기도 하고."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아버님을 우러러보고 있는지 그것을 모르시어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환이는 진심에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직 어린 네가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러나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남을 위하겠다는 것이 허욕이 아니고 뭐겠느냐? 하룻밤도 편안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 내가 말이다."
"공자께서는 사십에 불혹이라 하시었습니다."
"그 어른께서는 길을 구하여 생애를 걸으신 분이니까. 이 아비는 일개 필부이니라. 내 동학의 접주로서 하눌님의 말씀을 어긴 지 이미 오래이거늘, 나는 구도자가 아니다. 끝없는 싸움, 싸움의 회오리바람 속에 나를 잊고 싶은 게다. 그리고 죽음이 남아 있을 뿐이지."
"아버님!"
"만일 우리 동학이 마지막 승리를 거두고 이 땅 위에 화평이 찾아온다면 그날부터 나는 죽은 목숨이 될 게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나도 모르겠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백성을 위하는 것도 하나의 도가 아니겠느냐? 나는 그 도 밖에서 이는 일시적인 삭풍일 게다. 혼돈 속에서만 말을 몰 수 있는 위인이야. 화평스런 대로를 시위 소리 들으며 대교 타고 갈 위인이 못 된다 그 말이니라. 그 밀물 같은 시기가 지나가면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바닥 모를 허무의 아가리가 밤새껏 나를 괴롭히는 게야. 내 속에 이는 원한도 진정 그게 원한인가 믿을 수 없구나."
평소 환이에게 엄격한 부친은 아니었다. 때론 친구같이 허물 없이 대하기도 했었다.
"환아."
"예."
"너 절에 계시는 노스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민생을 외면하시고 홀로 쇠붙이를 모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부친은 빙그레 웃었다.
"홀로 절간에서 쇠붙이를 모시는 음, 그도 도에 이르기만 했다면야...... 그러나 너의 큰 아버님 마음은 때때로 항간을 헤매시니 말이다."
"어떤 사람은 큰아버님을 도를 깨친 법사라 하고 어떤 사람은 땡땡이중이라고 하더이다."
"필시 그 어느 편도 아닐 게다. 노스님께선 널 절에 두기를 원하셨지. 그러나 산간인들 항간인들 마음자리를 잡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너는 산에도 가지 말고 사람들 무리에도 섞이지 말고 마음씨 착한 처자나 얻어서 포전이나 쫓고 살아라."
환이는 오래도록 짚세기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일어섰다.
토지 4권 271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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