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유사한 인도적 정신은 세계 여러 문명권과 종교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인간의 '권리'라는 개념은 서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서양에서 처음부터 'human rights'라고 한 건 아니다. 처음에 '자연권(natural rights)'이라 부르다 나중에 '사람(남성)의 권리(rights of man)'라고 쓴 적도 있었다. 토머스 페인이 1791년에 내놓은 <인권>의 원 제목은 'Rights of Man'이었다. 프랑스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도 남성형 '사람(homme)'이 쓰였다. 중립적으로 '인간(human)'이라는 말은 누가 맨 처음으로 썼을까? 여러 주장이 있지만 1849년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시민 불복종>에 'human rights'가 나오는 건 확실하다. "사람을 부당하게 투옥하는 국가에서 정의로운 사람이 있을 수 있는 진정한 장소는 감옥뿐."이라는 유명한 구절 직전에 등장한다.
인간(human)이라는 말보다 권리(right)라는 말은 더 복잡하다. 서양 사람에게도 'right' 개념은 어렵다. 여러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동아시아 사람에게는 더 어렵다. 번역을 통해 새로운 의미가 덧씌워진 탓이다. 'right', 이 말은 고대부터 '객관적으로 옳고 정의로운 어떤 상태'를 뜻하는 어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옳은 질서, 즉 선이 이기고 악이 단죄되는 상태를 '디카이온(Dikaion)'이라고 했다. 그러다 중세 이후 'right'의 의미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인간이 마땅히 행사하고 요구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어떤 특별한 자격'이라는 주관적 의미가 덧붙은 것이다.
'right'의 뜻이 이처럼 여러 갈래였지만 워낙 핵심적인 개념이었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일 때 이 말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서구 문화를 수입하는 데 국운을 걸었던 일본이 대표적인 경우다. 메이지 시대에 일본은 철저하고 광범위한 번역에 몰두했는데, 학자들은 한결같이 'right'라는 단어의 번역이 특히 어려웠음을 지적한다. 그 시대에 나왔던 여러 사전을 보면 'right'가 무척 다양한 한자어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엔 염직(청렴하고 강직하다) 또는 정직으로, 그다음엔 도리, 당연, 면허, 권 따위로 옮겼다. 오늘날 널리 사용하는 권리라는 말은 1885년 처음으로 사전에 등장했다. 결국 '권리' 혹은 '권'이 번역어 경쟁에서 최종 승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말 역시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원래 도덕적이고 반권력적이고 장중한 어감을 지닌 'right' 개념이 권력과 이익과 힘의 느낌을 주는 '권리'로 번역되면서 본뜻이 왜곡되어 전달되었다는 이유에서다.
우리나라에서는 '권리'가 1880년대 후반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실록> 같은 공식 문헌에서 조금씩 사용되다 1890년대 들어 일반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국민소학독본>에 "칭호는 각각 다르나 상대하는 권리는 차등이 없느니다."라는 표현이 나오고, <서유견문>에도 권리란 말이 등장한다. 1896년 <독립신문>에는 "님군(임금)의 권리를 빼앗는 것이요, 백성에게 권리를 주는 것이니."라는 표현도 나온다.
오늘날에는 'human rights'가 '인간의 권리'라는 뜻으로 완전히 일반화되어 굳어졌지만 권리라는 말의 새로운 표현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정당하고 옳다'는 의미와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라는 뜻이 잘 배합된 새로운 말이 없을까? 비교적 본뜻에 가까운 번역어로 '의권(의로울 의, 권리 권)'은 어떨까? 이 질문은 단순한 탁상공론이 아니다. 실제로 인권을 둘러싼 여러 논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right'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의 문제로 귀결되곤 하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이들은 차별받지 말아야 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나 행동만이 차별 금지 원칙을 적용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식의 선별적 가치관은 원칙적으로 차별하지 않는 것이 '정당하고 옳다'라는 인권의 기본 전제에 어긋난다. 차별 금지를 반대하는 이들을 역사적으로 추적해 보면 재산이 없다는 이유, 여성이라는 이유,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 식민지 주민이라는 이유, 장애인이라는 이유,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정당화하면서도 그것을 인권 침해라고 결코 인정하지 않았던 허위의식과 연결된다. 'right'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인간의 권리 운운하는 건 이처럼 위험천만한 일이다.
<인권 오디세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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