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희 3

27 명희와 상현, 때 늦은 사랑고백

명희는 전차도 타지 않고 줄곧 걸었다. 효자동 어귀에 이르렀을 때, "제영이 고모 아닙니까!" 하고 바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있었다. "네?" "역시, 아까부터 그런 상싶어서, 급히 왔지요." 상현이었던 것이다. 명희의 낯빛이 확 변한다. "오래간만입니다." 상현의 안색도 파리했다. 몇 해 만인가, 상현의 하숙에서 빗길로 나간 그날 이래 처음 대면이다. 명희 눈에서 눈물이 쏟아진다. 상현이 당황하고 놀란다. 명희도 당황하고 놀란다. 명희의 눈물은 두 사람에게 다 같이 불의의 습격 같은 것이었다. "정말 얼마 만인지......" 눈시울을 흔들어대며, 그러나 눈물은 명희의 의지 밖에서 혼자 마음대로였다. 두 사람은 조금 거리를 두고 걷기 시작한다. "요즘엔 어떻게 지내세요. 여직도 약주 많이 드세요?" ..

3부 3편 태동기

기차가 용산역으로 들어가고 있다. 서의돈은 신문으로 얼굴을 덮고 코를 골고 있다. 대학생 차림의 청년이 흔들어 깨운다. '용산입니다, 형님' 선우일의 동생, 선우신이다. '개새끼들!' 서의돈은 눈에 핏발이 서서 시뻘겋고 험했다. 동경에 머물러 있던 선우신에게 서의돈이 노무자 꼴로 불쑥 찾아왔었다. 이삼 개월 신세를 져야겠다면서. 한데 며칠이 안 되어 관동대지진이 발생했다. 생지옥. 유언비어에 선동된 군중이 닥치는 대로 조선인을 참살했다. 유언비어의 근원은 일본의 위정자들이었다. 오천이 넘는 조선인들의 목숨 따위, 그들에게는 빈대로 보였을지 모른다. '신상, 신상!' 서울역에 내린 선우신을 안경 쓴 사내가 급히 불러댔다. 그의 뒤에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주춤거리듯 여자가 따라온다. 오가타 지로다. 여자는..

3부 2편 어두운 계절

용정촌에 한복이가 내려섰다. 한복이는 거리를 바라보며 몸을 떤다. 사방을 살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는다. 상상하기조차 힘든 거금을 몸에 지녔다는 그 자체가 한복으로선 가장 무서웠다. 한복이는 공 노인의 객줏집을 찾아 들어갔다. 한시라도 바삐 짐을 넘겨주고 싶다. 공 노인을 마주친다. 한복이는 전대를 끌러 공노인 앞으로 밀어놓고 평사리 소식을 전한다. 열흘 후 길상을 만나고 길상과 함께 훈춘행 마차를 탄다. 장인걸과 송인환의 환대를 받고 주연을 갖는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얘기는 계속되는데, 한복이는 얼떨떨하다. 장인걸과 송인환의 귀빈 대접이 자신의 형, 거복이 때문임을 깨닫는다. 자신을 이중삼중의 그늘에 숨겨진 인물로 만들려는 의도인 것이다. 원망과 우울함 속에서 살인자인 아버지, 매국노인 형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