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5

26 이십년만의 평사리 추석 잔치

거의 이십 년 만에, 평사리의 추석은 풍성하였다. 올벼를 베었을 뿐 논에는 황금물결이 이랑을 이루고 있었다. 평작은 넘는 농사여서 떡쌀을 담그는 마을 아낙들의 손길은 떨리지 않았고, 옛 지주요 오늘날의 지주인 최서희가 모처럼의 행차 선물인 듯 적잖은 전곡을 풀었으며 밤에는 오광대까지 부른다는 얘기였다. 홍이는 추석놀이를 위해 이틀 동안 아비에게 장고 치는 법을 배우고 또 연습했다. 차례 성묘가 끝날 무렵, 반공중에서 서편으로 해가 약간 기울 무렵 타작마당에 징이 울리면서 놀이는 시작되었다. 놀이꾼들 속에서 용이는 장고를 짊어졌고, 봉기와 성묘차 온 영팔이도 고깔을 쓰고 나섰다. 1903년, 보리 흉년으로 거리마다 아사자가 굴러 있던 비참했던 그해, 마누라를 굶겨 죽이고 그 자신도 실성하여 걸식하던 서금돌..

24 늙은 용이, 아들 홍이와의 대화

저녁 무렵 용이는 홍이를 데리고 산소로 올라갔다. 술을 부어놓고 삼배하고 술을 뿌리고 나서 부자는 서로 멀거니 바라보며 풀밭에 앉았다. "홍아." "예." "니하고 나하고는 시작도 못하고....... 내가 늙어부린 것 겉다." 홍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무엇을 시작해보지도 못하였는가 잘 알겠기 때문이다. 부자간의 정의도 나누어보지 못하고, 그리고 죽을 날이 가까워왔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마당에 후회나 뉘우침은 없고, 오로지 아들에게 조상의 무덤만을 맡기고 떠나게 되는 것이 안쓰러운 것이다. "아부지!" 홍이는 고개를 떨군 채 흐느껴 운다. 무엇 때문에 세상에 둘도 없는 부자가 싸늘하게 살아야 했던가. 처음에는 아비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다음에는 자신이 받는 고통 때문에, 분출할 길이 없는 젊음..

21 죽어가는 월선과 용이의 만남

섣달그믐 날 해거름이었다. 망태 하나를 어깨에 걸머지고 초췌해진 사내가 집안으로 들어섰다. 솜을 두어 누덕누덕 기운 반두루마기도 벗어던진다. "홍아!" "홍아! 아버지 왔다!" 홍이 안방 문을 박차듯 뛰어나온다. 동시에 작은방의 문이 떠나갈 듯 열렸고 영팔이와 두매가 나왔다. 홍이의 얼굴은 홍당무였다. 모두 벙어리가 되어버렸는지 용이 뒷모습을 쳐다본다. 누구 한 사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몸 전체에서 뿜어내는 준엄한 기운에 세 사람은 압도되어 선 자리에 굳어버린 채다. 방문은 열렸고 그리고 닫혀졌다. 방으로 들어간 용이는 월선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을 월선은 눈이 부신 듯 올려다본다. "오실 줄 알았십니다." 월선이 옆으로 다가가 앉는다. "산판 일 끝내고 왔다." 용이는 가만히 속삭이듯 말했다. "야...

14 서로 의지하는 용이와 영팔이의 헤어짐

영팔과 용이 걷는다. "용아." "음." "아무래도 시일이 좀 걸리겠제?" "가봐야 알겄지마는 일찍 오믄 머하겄노. 용정에는 아직 집일이 한창일 기고 품 좀 팔다가 산에 들어갈 시기쯤 해서 오든가." "여기도 품일이야 얼매든지 있지. 웬만하믄 추석은 여기 와서 쇄라." "가봐서." 한참 동안 말없이 걷다가 영팔이 입을 연다. "나는 니가 온다니께 이자는 살 성싶다. 우떡허든지......" "......" "뻬가 빠지는 한이 있어도 돈 모아서 고향 가야제. 맘 겉에서는 빌어묵으서라도 가자......하로에도 몇 분 그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이 험한 고장에 와서 돼지겉이 살믄서 되놈들 종 노릇까지 할라 카니, 지금 생각하믄 그때가 청풍당석이던 기라." "그렇지마는 고향 돌아가는 일이 그리 쉽겄나. 조가 놈이..

8 임이네의 출산

방 안에서 임이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녁이 좀 들어와야겄소." "내가?" "그라믄 우짤 기요? 이 차중에 아무도 없이 우찌 아일 낳을기요?" "내, 내가." "그, 그라믄 우짤 기요? 누구 자식인데 이녁이 그러요!" 화내는 소리에 용이는 더듬듯 마루를 올라선다. 방문을 연다. 문바람에 등잔불이 흔들렸다. 벽을 짊어지고 앉은 임이네는 무서운 눈으로 용이를 노려본다. 머리를 벽에 부딪으며 임이네는 소리를 질렀다. 진통이 오는 모양이다. "아이구우, 어매! 나 살리주소!" 두 손을 쳐들고 허공을 잡는데 이빨과 이빨이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눈알이 튀어나올 듯, 이마에서 두 볼에서 구슬땀이 솟아나온다. 임이네는 앞으로 넘어져 오며 두 팔로 용이 정강이를 안는다. 여자의 팔은 쇳덩이같이 단단했다. 두 팔은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