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이 3

3부 4편 긴 여로

묵직한 몸집에 사십이 넘은 근화방직회사 사장인 황태수가 임명빈 집 앞에 와서 하인을 부른다. 얼마 안 있어 임명빈의 아내 백씨가 황급히 나온다. 이 집을 덮쳤던 3.1 운동의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지 십 년, 평탄한 일상과 안정된 중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이다. 황태수가 임명빈을 찾아온 것은 계명회 회원 모두가 검거된 사건 때문이다. 서의돈을 필두로 열대여섯 명이 체포되었는데, 간도의 김길상도 체포됐다. 길상은 용정촌 공노인이 경영하는 여관에서 서의돈과 만난 자리에서 함께 끌려온 것이다. 황태수에게는 거의가 친구며 후배들이다. 오래지 않아 임명빈을 만나 사건의 대략을 상의하는데, 황태수는 임명빈의 위치가 구애될 것이 없으니, 임명빈에게 재량껏 뒷바라지를 요청하며 봉투 하나를 꺼낸다. 임명빈은 황태수..

2부 4편 용정촌과 서울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터였지만 용정촌 역두에서부터 최서희의 콧김이 세다는 것을 혜관과 기화는 실감하며 걸음을 내딛는다. 혜관 뒤를 조르르 따라가는 기화는 불안전해 보인다. 기화는 오소소 떨며 한기를 느끼듯 마음이 추운 것이다. 혜관과 기화를 별채에 안내하라 일러놓고 서희는 생각에 빠져든다. 봉순아! 부르며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서희는 그리운 정을 손아귀 속에서 뭉개버린다. 확고부동한 권위의식이 잠시 동안 거칠었던 숨결을 잠재워준다. '하인과 혼인을 했다 해서 최서희가 아닌 것은 아니야. 나는 최서희다! 최참판댁 유일무이한 핏줄이다!' 권위의식의 깊은 곳으로 빠져드는 그것은 서희의 불도 살라 먹으려는 무서운 집념이다. '오래간만이군, 봉순이.' '애기씨!' 서희의 손은 싸늘..

16 관수의 바른소리 하기

쪼깐이 집의 국밥, 무를 엇비슷이 썰어 넣고 끓인 생대굿국이다. 석이 입에 쫄깃쫄깃한 대구 살이 달다. 젖 빛깔이 방울방울진 고기는 입속에 들어가기가 바쁘게 녹는다. 향긋한 생파 내음, 사발의 바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발을 기울이며 남은 것을 아쉽게 퍼올리는 석이 모습을 여자는 멸시의 눈으로 힐끗 쳐다본다. 눈살을 찌푸린다. "아지마씨." "예." "물지게꾼이 내놓는 국밥 값은 썩은 돈이오?" "무슨 말을 그렇게." 느닷없이 하는 말에 여자는 당황한다. "똑똑히 들으시오, 각시. 그렇지 두만이 각시믄, 작은 각시든 큰 각시든 각시는 각시니께로." "아니." 얼굴이 벌게진다. "보소 서울각시, 각시 씨애비 씨에미 그라고 서방도 다 그렇기 누데기옷을 입고 살아왔소. 그거는 그렇다 치고 또 니는 머꼬? 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