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 4

15 서희와 길상의 다툼

길상은 말을 뚝 끊고 고개를 숙인다. 조는가 했더니 자맥질하던 해녀같이 얼굴을 치켜세운다. 몽롱한 취안이다. 씩 웃는다. "최서희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어? 흥, 천하를 주름잡을 텐가? 어림도 없다!" 어조를 싹 바꾸며 반말지거리다. 장승처럼 서 있는 서희 얼굴에 경련이 인다. "넌 일개 계집아이에 지나지 않단 말이야! 거 꿈 하나 거창하지. 아무리 돼지 멱따는 소리 질러봐야 이곳에 구종별배도 없고 으음, 있다면 왜놈의 경찰이 있겠구먼. 흥, 그 새 뼈가지 몸뚱이로 어쩔 텐가? 난 지금이라도 널 희롱할 수 있어. 버릴 수도 있고 흙발로 짓밟을 수도 있고 가는 모가지를 비틀어 죽일 수도 있다 그 말이야. 나 술 안 취했어. 내 핏속엔 술이 아니고오, 음 그렇지 그래. 대역죄인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게야. 아..

2부 2편 꿈 속의 귀마동

자그마한 몸집의 윤이병이 대문께에 서 있다. 송장환을 찾아왔는데 멍청한 모습이다. 강가로 나가더니 한 숨을 쉰다. 누이가 집에서 도망을 와서 돈 마련해 주길 청한다. 윤이병은 거짓말을 했다. 삼 년 전, 예배당에 나가면서 알게 된 애인의 집안이 망하기 시작했다. 아비가 투전에 재미를 붙여 가산을 탕진한 끝에 딸을 술집에 팔아먹은 것이다. 그 후 여자는 어떤 사내가 몸값을 치르고 빼내서 해삼위로 갔는데 여자는 도망을 쳐서 윤이병을 찾아왔었다. 사나흘 후 사내가 들이닥쳐 여자를 앗아갔다. 지금 비슷한 일이 또 생긴 것이다. 그 사내가 바로 김두수요, 여자의 이름은 심금녀. 해는 서쪽 편으로 기울고 김두수는 같은 마차를 타고 가는 나그네와 얘기를 나눈다. 나그네는 왼편 귀 근처로 해서 입술 가까이까지 푸르스름..

12 길상과 어린 옥이의 첫 대화

그곳은 처마 밑이었는데 계집아이 하나가 벽 쪽에 등을 바싹 붙이고 앉아 있었다. 낙수에 패여 땅이 움푹한 곳에 괴다가 흐르곤 하는 빗물에 연방 생기고 꺼지고 하며 흐름을 따라가는 거품을 계집아이는 손가락 끝으로 지우고, 지우곤 하는 것이다. 귀밑머리를 쫑쫑 땋아 뒷머리와 한 묶음이 된 노르스름한 머리털이 축축이 젖어 있다. 계집아이는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눈을 들다가 어른의 구둣발을 보고 차츰차츰 고개를 치올린다. 뉘한테 야단을 맞았는지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남아 있다. "옥아?" "......." "뭘 하고 있니." "아주방이." "오냐." "어째 내 이름으 알지비?" 길상은 빙그레 웃는다. "옥이는 아주방일 모르겠어?" "응."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눈치다. 하기는 그때 옥이 눈에는 먹을 것 이외..

1부 5편 떠나는 자, 남는 자

행랑 쪽 모퉁이로 길상이 급하게 뛰어간다. 봉순이도 급히 걸어가고 김서방 댁도 엉기정엉기정 따라간다. 수동이 거처방에서 울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수동이는 눈을 뜬 채 죽어있다. 조준구와 홍 씨는 속이 후련해지며 희희낙락이다. 불리해지는 현실 가운데 서희는 포악스럽고 의심이 많아지고 있다. 반면, 제 나이를 넘어선 명석함으로 사태를 가늠하는 냉정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봉순이는 길상을 깊이 사모하지만 길상은 봉순이를 피하는 것이 완연했다. 한편, 봉순이는 다른 꿈을 좇고 있다. 평생을 비단옷에 분단장하고 노래 부르며 사는 세상, 그곳으로 끌려간다. 한 번은 길상이 니 겉은 화냥기 있는 가씨나는 싫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길상이는 후회했지만, 봉순이한테 깊은 상처,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주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