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구 5

3부 1편 만세 이후

동대문 밖 골목 상현이 거처하는 집에 억쇠가 찾아왔다. 마음과 몸이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다. 상현이 소식 없는 것에 화가 나서 악을 쓰지만 이내 호소 조로 나온다. 격하고 편협한 상현의 성질을 알기 때문이다. 지난 삼월의 만세 시위가 상현의 눈앞을 지나간다. 시위군중 속에서 서의돈과 눈물을 나누고 '조선 놈들 제법이다' '독립되는 날에 밟혀 죽읍시다!'라고 외쳤었다. 이제 서의돈은 상해로 가버리고 독립운동의 불씨는 잦아들어 버렸다. 상현은 해외의 뭇 단체나 독립투사에게 기대를 걸지 않는다. 상현은 자신에게도 절망하여 수렁에 빠져 있다. 전라도의 갑부 아들 전윤경을 따라 전주에 내려간다. 전주에 봉순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동행한 것이다. 기화의 집을 알아내 기화의 처소에서 시간을 보..

23 서희와 조준구의 최종거래

"집은 얼마에 내놓으셨지요?" 서희의 침묵이 깨어졌다. "집을 내어놓다니?" "......." "집문서는 언제든지 내줄 수 있고 명의변경도." "안 파시겠다, 그 말이구먼." "그, 그렇지." "그러면 만날 필요가 없지요." "굳이 그렇다면야," "굳이가 아니에요!" 서희 눈에서 불덩이가 떨어지는 것만 같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필요한 돈은 오, 오천 원인데," "오천 원에 내놓으셨군요." "......." "서류는 가져오셨나요?" "가, 가지고 있지." "유모." "예, 마님." "안방에 가서 머릿장 속에 있는 푸른 보자기를 가지고 오시오." "네." 유모가 나간 뒤, "고맙네, 고마워." 서희는 남쪽으로 트인 창문에 눈을 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유모가 나타났다. 서희는 지폐 다발을 내민..

2부 4편 용정촌과 서울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터였지만 용정촌 역두에서부터 최서희의 콧김이 세다는 것을 혜관과 기화는 실감하며 걸음을 내딛는다. 혜관 뒤를 조르르 따라가는 기화는 불안전해 보인다. 기화는 오소소 떨며 한기를 느끼듯 마음이 추운 것이다. 혜관과 기화를 별채에 안내하라 일러놓고 서희는 생각에 빠져든다. 봉순아! 부르며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서희는 그리운 정을 손아귀 속에서 뭉개버린다. 확고부동한 권위의식이 잠시 동안 거칠었던 숨결을 잠재워준다. '하인과 혼인을 했다 해서 최서희가 아닌 것은 아니야. 나는 최서희다! 최참판댁 유일무이한 핏줄이다!' 권위의식의 깊은 곳으로 빠져드는 그것은 서희의 불도 살라 먹으려는 무서운 집념이다. '오래간만이군, 봉순이.' '애기씨!' 서희의 손은 싸늘..

1부 4편 역병과 흉년

나귀에서 내린 조준구는 뻣뻣하게 힘을 주며 목을 돌려 돌아본다. 뒤따르던 초라한 가마 두 틀이 멋는다. 가마 속에서 나온 여인은 삼십오륙 세쯤 돼 보이는 조준구의 부인 홍 씨였다. 안 오겠다는 것을 감언이설로 얼러가며 여기까지 데려왔다. 다른 가마에서는 사내아이가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데 창백한 얼굴에 눈은 무섭게 큰 꼽추였다. 조준구는 윤 씨 부인에게 생계가 막막하여 내려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윤 씨 부인은 뒤채에 머물게 한다. 이 무렵 김서방은 각 처에 있는 최참판댁 농토를 돌아본다. 올해 수확을 예상하기 위해서다. 소나기를 피하고 얼마 되지 않아 햇볕은 쏟아지고 별안간 김서방 속이 울렁거린다. 마지막 행선지 용수골을 떠날 때는 속이 뒤집힐 것 같이 고통스러웠다. 최참판댁에 당도한 것은 밤이 이슥했을 때..

1부 1편 어둠의 발소리

섬진강 평사리 최참판댁은 사대에 걸쳐 마을 가뭄에 치부를 일삼아 만석꾼이 되었다. 향민의 원한이 켜켜이 쌓여 최참판댁은 자식이 귀하다고 전해 내려온다. 1897년, 최참판댁의 주인은 최치수로 병약하고 날카로운 인물이다. 서희는 앙증스러운 다섯 살 배기 최치수의 외동딸이다. 삼 년 전 추운 겨울날, 스무한두 살쯤 되어 보이는 남루하지만 준수한 용모의 젊은 사내가 찾아왔다. 성이 김이라고만 얘기하는 젊은 사내는 뜻 밖에 머슴살이를 부탁했고, 최치수의 모친, 윤 씨 부인의 허락으로 최참판댁에서 지내게 되었다. 이름은 구천이 되었다. 하루 해가 저물어 마름들이 대부분 돌아가면 하인들은 뒷정리를 하고 열쇠꾸러미가 안방으로 들어가면 불이 하나 둘 꺼지면서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진다. 돌이와 삼수는 구천이 오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