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공부/노화맞이

내가 75세에 죽기를 희망하는 이유(Why I hope to die at 75)

밭알이 2022. 2. 5. 17:07

***노후를 알아보다가 접한 칼럼이다. 사분의 일 정도로 줄였지만 전체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내가 살기를 원하는 햇수는 75년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나의 딸들, 형제들, 사랑하는 친구들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생각도 할 것이다. 그들은 내가 잘못 판단하고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75세를 넘어서도 잘 사는 무수한 사람들을 얘기할 수도 있다. 반면, 단순한 진실이 있다. 너무 오래 사는 것이 좋지 만은 않다는 것이다. 너무 오래 사는 것은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을 불구는 아니더라도 바르게 걸어 다니지 못하게 만든다, 죽음보다 나쁘진 않더라도 창의성이나 일, 사회, 직장에 공헌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는다.
  나는 75세 즈음에는 온전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것이고, 내 인생의 하고 싶은 것들을 추구하고, 중요하든 중요하지 않든 어떠한 공헌도 했을 것이다. 75세에 끝나는 삶은 비극이 아니다. 분명하게 얘기하고 싶다. 나는 내 인생을 단축하려는 게 아니다. 안락사나 자살로 내 인생을 끝내지도 않는다.
  나는 내가 얼마나 오래 살고 싶어 하는지, 75세 이후 건강을 어떻게 관리하면 좋은지 얘기하고 싶다. 미국인들은 죽음을 피하고 가능하면 생명을 연장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하나의 문화 현상인데, 나는 이것을 '불멸의 미국인'이라고 부른다. 나는 생명을 영원히 연장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어떻게 보면 파괴적이라고 생각한다. 몇 가지 이유로 볼 때 75세는 삶을 멈추기에 정말 좋은 나이이다.
  먼저 인구통계학 측면에서 노년의 시간은 삶의 질이 좋지 않다. 기대수명은 1900년 47세에서 1990년에는 75.4세로 늘었다. 20세기 전반에 백신, 항생제, 의료 수준 향상으로 아이들의 조기사망이 줄어듬에 따른 결과였다. 그러나 1960년 이후 장수하는 사람의 증가는 60세 이상의 수명이 늘었기 때문이다. 불멸의 미국인은 '병적상태의 단축'을 절실하게 믿고 싶어 한다. 수명이 길어지면 온전하지 못한 시간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생이 길어지면서 더 건강해졌는가?

  50년 전과 비교해 보면 오늘날 노년의 장애는 줄어 들었다. 하지만, 최근 10년간의 자료를 보면 장수하는 사람의 증가는 장애를 가진 사람의 감소가 아니라 증가와 부합한다. 최근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조사하여 확실해졌는데, 병적상태의 '단축'이 아니라 '팽창'이고 기대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장애로 손실을 입는 절대 햇수는 증가한다. 지난 50년 동안 죽음을 늦추는 만큼 노화의 과정을 늦추지 못했다. 현대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가늘고 길게 되었다.
  뇌졸증을 예로 들면, 2000년부터 2010년 사이에 뇌졸중으로 인한 죽음은 20퍼센트 감소하였다. 하지만, 680만 명의 미국인이 반신불수나 언어장애, 1300만 명 이상이 기능장애와 인지장애의 후유증을 가지고 있다. 향후 15년 내에 50퍼센트 증가할 것이다. 치매나 다른 후천적 정신장애는 더 큰 걱정거리다. 현재 65세 이상 미국인 500만 명이, 80세 이상에서 세 명 중 한 명이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 알츠하이머병은 예방이나 회복은커녕 악화를 멈추려는 시도조차 수 없이 실패하고 있다.
  하지만,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피한 많고 많은 노인들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그런 경우라면 왜 75세에 멈추어야 하는가?
  우리는 나이들어 실성하지는 않더라도 정신적 기능은 나이 듦에 따라 나빠진다. 나이 듦에 따라 움직임이 느려지고 생각도 느려진다. 75세쯤 되면 우리 대부분은 창의성, 독창성, 생산성을 잃는다. 이러한 사실은 생물학에 기반하여 예측할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이 사용하는 신경망 연결상태는 유지되고 강화되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는 신경망 연결상태는 위축되거나 사라진다. 뇌의 유연성은 평생 유지되지만, 온전하게 다시금 연결되지 않는다. 

  나의 주장이 좀 별난 집착인가? 인생에는 완벽하게 육체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나 유산 만들기를 계속 더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지 않은가. 다음 세대를 멘토링하는 것은 어떤가. 멘토링은 연장자의 기억을 모아서 우리에게 전달하고 그들의 지혜를 우리에게 끌어 온다. 반면,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퇴직을 거부하는 방편으로 일축되고 평가절하되었다. 우리는 줄어드는 능력을 받아들이면서도 나이에 알맞은 활동과 프로젝트를 선택하는 방법을 통해 어느 정도 성취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만족할 수도 있지만, 이제 사실상 활동범위는 작고 초라하다. 하지만, 인생에는 직업이나 창조에 초점을 맞춘 젊은 열정 이상의 것이 있지 않은가. 후손말이다. 
  우리가 가능한 한 오래 살게 될 때, 우리가 종종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우리가 너무 오래 살게 될 때 우리는 자손들에게 확실한 감정적 부담을 주게 된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큰 그림자가 된다. 부모가 살아 있는 한 피할 수 없다. 아이들은 부모가 죽은 후에도 이 무게감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오래 사는 부모들은 다 큰 아이들이 성인 남자와 여자로 독립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아이들에게 시간을 많이 남겨 주지 않고, 남겨준 시간은 대부분 노년의 시간일 뿐이다.
  후손들이 어떻게 기억하길 원하는가? 우리의 전성기 때를 기억해 주기를 원하고, 독립적이면서 그들에게 짐을 지우는 경험이 없는 그런 기억됨을 원한다. 그런 점에서 75세는 우리가 풍부하고 완벽한 삶을 사는 유일한 순간일 것이고, 자녀들이 우리를 좋게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들이 우리의 활기찬 모습이 아니라 허약한 모습을 기억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비극이다.

  나의 견해는 개인적인 한 가지, 정책적인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보여 준다. 75세가 되면서 건강관리에 대한 나의 접근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나는 적극적으로 내 삶을 끝내지도 않겠지만, 연장하려고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 75세 이후로는 어떤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진료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합당한 이유에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 나는 정기적인 예방 점검이나 의학 검사를 받지 않을 것이고 고통이나 신체불능에 대한 완화치료만을 받을 것이다.
  75세 이후로는 결장내시술(대장내시경)이나 다른 암검사는 받지 않는다. 전립선검사는 어느 나이에도 받지 않는다. 심장병 검사도 마찬가지다. 심박조율기나 이식할 수 있는 제세동기를 거부한다. 신장판막 교체나 우회수술을 받지 않는다. 폐기종 같은 병으로 악화된다면 질식하지 않게 하는 처치만 받을 것이다. 독감 주사도 맞지 않는다. 폐렴, 피부나 비뇨기 감염 시에 항생제는 큰 효과가 있다. 그러나 만성 질병의 경우 감염이 빠르고 덜 고통스럽다. 그래서 항생제도 복용하지 않는다.
  분명하게 얘기한다. 나는 완화치료를 제외하고 소생시키지 않는다는 주문이나  산소호흡기, 투석, 수술, 항생제 등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공적으로 기록할 것이다.
  첫 번째 정책적 의미는 건강에 대한 관리수준 측정에 기대수명을 사용하는 것과 관계된다. 한 국가의 남성과 여성 모두 평균수명이 75세를 넘으면 이런 측정은 무시되어야 한다. 대신 아이들의 건강 측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미국의 조산이나 유아사망, 청소년 사망 수치는 부끄러운 수준이다. 두 번째 정책은 생물의학 연구와 관계되는데, 나이 들면서 불구가 되게 하고 만성 질환인 알츠하이머에 대해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

  다시 분명히 하자. 가능한 한 오래 사는 것이 비윤리적이거나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질병이 생겼을 때 미국에서 이용가능한 최선의 의료서비스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우리 나이에 있는 이들에게 충고하고 싶을  뿐이다. 선택은 그들 몫이고 나는 그들을 지원하고 싶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나의 견해를 소개하는 것이고, 내 친구와 다른 이들이, 그들이 늙어 가며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또한 내 견해가 사람들이 경멸하거나 거부하는 영적이고 실존적인 이유를 떠 올기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목적에 대해, 우리가 남길 표식에 대해 생각하기를 지속적으로 회피한다. 우리는 '생산적인 일상 productive routine'에 빠져 있어 그것들을 무시하고 있다. 반면, 75세는 나에게 명확한 시점을 알려준다. 이 특이성은 우리가 남기길 원하는 것을 숙고하고 깊은 실존적 질문을 하게 하고 우리 인생의 마지막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75세의 특이성은 우리가 더 이상 그것들은 계속 무시하지 못하게 하고 사회적으로 쉽게 받아들이는 불가지론을 유지하지 못하게 한다. 나는 이런 질문들에 애쓰며 나아가는 것이 죽음의 과정을 연장하며 육체적인 고통을 견디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능한 한 오래사는 것에 대해 격렬하면서도 합리적인 대응을 보여주는 쪽으로 내 마음을 바꿀 권리가 있다. 결국 나는 75세 이후에도 여전히 창의적인 삶을 살 것이다.  

 

                                                                                           에제키엘 J. 임마누엘, 2014년 10월

'인생 공부 > 노화맞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정스님의 노화에 대한 단상  (0) 2023.01.02
허리디스크  (1) 2022.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