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또 뉘엿뉘엿 기울고 있다. 몇 해 전 섣달 그믐날의 그 체험이 되살아난다. 그날의 일과를 마치고 자리에 누워 눈을 붙이려고 하다가, 문득 '내 나이가 올해 몇이더라?' 하는 생각에 미쳤다. 나이를 세거나 의식할 일이 없는 처지여서 새삼스런 물음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먹은 나이를 헤아리다가, '아니 그럼 내일모레면 50이 되게? 머지않아 60, 70?' 순간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부질없이 살아버린 날들이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훨씬 많은 걸 뒤늦게 알고 내 생이 새삼스레 허무감으로 휘청거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내 돌이켜지는 생각. 그래 사람이 만약 1백 년 2백 년을 산다고 해서 좋을게 뭔가. 그렇게 되면 사람이 얼마나 추하고 천해질 것인가. 수목은 오래될수록 늠름하고 기품이 있지만, 사람은 살 만큼 살면 헌 수레와 같이 삐그덕 삐그덕 고장이 많고 주착을 떨다가 추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살 만큼 살았으면 생에 미련을 두지 말라는 소식일 것이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지는 것도 지금까지 살면서 볼 것 못 볼 것 많이 보았고, 들을 소리 못 들을 소리 많이 들었으니, 늙어서는 시시한 것은 그만두고 꼭 필요한 것만을 보고 들으라는 뜻일 수도 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하직하면 억울하고 서운할 테니까 조금씩 조금씩 사그라져 가는 연습을 미리 해두라는 배려이기도 할 것이다. 이 또한 생명의 질서요 조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고 보면 나는 이 기구한 세월에 반 세기 가까이 살았으니 이제 죽는다 해도 억울한 것은 조금도 없다.
문제는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사느냐에 있지 않고, 자기 몫의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이 미치자 조금 전의 그 아찔한 허무감은 이내 지워지고 말았다.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인간답게, 내 자신답게 후회 없이 사는 일이 새로운 과제로 다가섰다.
나는 인간으로서 그 기능과 역할이 끝나는 그날로 미련 없이 몸을 바꾸고 싶다. 몇 날을 더 연명시키기 위해 비쩍 마른 팔에 주삿바늘을 꽂는다거나 억지로 입을 벌려 약을 먹인다면, 나는 그런 이웃에게 화를 내고 심히 원망을 할 것이다. 사람은 살 때에 빛이 나야 하듯이 죽을 때에도 그 빛을 잃어서는 안 된다. 생과 사가 따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겉과 속의 관계라고 하니 더욱 그렇다.
고려 중기의 뛰어난 선사 진각 혜심은 정월 초하루 아침 이렇게 말했다.
"어린이에게는 한 살이 보태지고 노인에게는 한 살이 줄어지며, 늙고 어림에 상관없는 이에게는 줄지도 않고 보태지 지도 않을 것이다. 보태고 줄어짐이 있거나 말거나 모두 한쪽에 놓아버려라. 놓아버린 뒤에는 어떤가?"
날마다 새 날을 이루소서.
<산방한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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