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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 간 충돌'에 대해

밭알이 2023. 3. 14. 12:00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권리 간 충돌 문제에 관해선 확실한 정답이 없다'가 정답이다. 사례별로 따져봐야 한다.
  우선 권리의 충돌에도 여러 유형이 있다. 첫째, 종류가 다른 권리들이 충돌하는 경우가 있다. 대중의 알 권리와 공인의 사생활 권리를 생각하면 된다. 둘째, 동일한 권리의 행사 방식과 한계 설정을 놓고 갈등하는 경우도 있다. 표현의 자유가 소중하지만 '일베'의 행태에 어떤 제한을 가해야 할지 고심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셋째, 한 사람의 내면에서 서로 다른 권리들이 충돌하기도 한다. 내가 믿는 종교의 가르침과 시민 의식이 갈등하는 게 좋은 예다. 넷째, 법적 권리와 사람들의 가치가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권리'라는 말에는 여러 차원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인권의 관점에서 보자면 제일 중요한 권리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인권 규범에 부합하는 권리다. 인권은 아니지만 법적 효력을 지닌 권리도 있다. 그다음 단계로, 중요한 이익 또는 권익이 있을 수 있다. 이 역시 현실에서나 법정에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또한 법에 명시되진 않았지만 어떤 집단에서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의 문화적 영향력을 감안해 권리 비슷하게 인정해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권리 간 갈등 문제를 해소할 방안이 있는가. 몇 가지 기본 원칙이 있다. 첫째, 권리들 중 대다수는 절대적 권리가 아니다. 가장 오해가 많은 부분이다. 자연법 전통의 천부인권론이 오늘날까지 큰 영향을 끼치면서 인권은 신성불가침이고 절대적이라는 믿음이 정설처럼 자리 잡았다. 하지만 남을 해치면서까지 내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아무리 확실한 권리라 하더라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일정한 한도 내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오늘날 인권이 대단히 매력적인 담론으로 떠오르면서 이런 초보적 사실조차 헷갈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둘째, 권리들 간에 서열을 매길 수는 없다. 정책적으로 어떤 권리를 먼저 시행할 수는 있겠지만 원칙적으로 모든 인권의 가치는 똑같이 중요하다. 권리들이 충돌할 때 어떤 권리를 배제할 것이 아니라 모든 권리를 반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를 찾아야 한다. 즉 인권에서도 균형과 타협이 필요하다. 
  셋째, 어떤 것에 대한 청구권이 있다 하더라도 그 권리를 모두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고 했다 해서 다산콜센터의 상담사에게 모든 맛집 정보를 요구하거나 어떤 속옷을 입고 있느냐고 묻는 따위의 성희롱을 할 권리는 세상에 없다.
  넷째, 권리들끼리 충돌할 때엔 각 권리의 범위를 정해야 하고 사안의 맥락을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누구나 공개적으로 발언할 자유가 있지만 어떤 맥락에서 그것이 표출되는지는 따져보아야 한다. 사람이 가득 찬 소방서에서 "극장이야!"라고 소리치는 건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사람이 가득 찬 극장에서 "불이야!"라고 소리칠 자유는 인정되지 않는다. 또한 그 사회의 법적, 문화적 규범도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예컨대 장유유서의 정서가 강한 사회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욕설을 퍼붓는 행위를 표현의 자유라는 식으로 옹호하기는 어렵다. 
  다섯째, 본질적 권리인지 부차적 권리인지 경중을 판단해야 한다. 이것을 핵심적 권리와 주변적 권리로 구분하기도 한다. 모든 '권리'의 무게가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사안별로 권리들의 무게가 다르고, 같은 권리라 해도 경우에 따라 무게가 달라진다. 
  서구에서 간혹 인용되는 사례가 있다. 소수자 정체성을 지닌 어떤 사람이 자기 정체성과 관련된 업무로 관공서를 찾았다. 공교롭게도 종교를 이유 삼아 그런 정체성에 반대하는 공무원이 창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직원은 자신의 신앙 때문에 그 업무를 볼 수 없다고 하면서 다른 직원을 불러주겠다고 했지만 차별적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했다. 하지만 법원은 종교적 신념에 따른 업무 거부가 본질적 권리에 해당한다고 공무원의 손을 들어줬다. 비슷한 사례가 또 있다. 특정 종교적 신념이 있는 인쇄업자가 소수자 단체에서 요청한 책자 제작을 거부했다가 제소당했다. 이번에는 법원이 인쇄업자의 행동을 차별이라고 판결했다. 종교적 신념 때문이라 해도 영업 거부권은 주변적 권리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이처럼 권리 간 충돌 문제는 일률적 잣대로 판단하기 어렵다. 원칙, 상식, 균형 감각을 발휘해서 황금비를 찾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떤 원칙인지, 어떤 상식인지를 면밀히 따질 필요는 있다. 인권의 원래 취지는 인간의 본질적 이익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적 다수결 원칙으로도 인권을 침해하진 못한다. 그렇다면 권리 충돌이 발생할 때 되도록이면 약한 사람과 소수자의 눈높이에 인권의 눈금을 맞춘다는 원칙과 상식을 지켜야 한다.


                                                                   <인권 오디세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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