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없이' 살고 있다. 출근길 발걸음은 시간 없이 살고 있음을 직설적으로 보여 준다. 앞선 사람이 조금이라도 천천히 걸으면 '길막'의 한숨을 내뱉는다. 계단을 오를 때면 숨이 차오른다. 숨이 차오름을 느끼면서도 발걸음은 늦추어지지 않는다. 지하철이 도착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되뇌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종착에서의 안도감은 회색빛 감정을 일으킨다.
걸음이 빨라진 것처럼 말도 빨라진다. 대화는 되받기에 급하고 말은 기-승-합-승의 연쇄작용을 통해 부풀어 오른다. 거대한 말 덩어리에 눌려 화자들은 갑갑해하는 모양새다. 심지어 책을 읽는 눈동자의 움직임도 빨라진다. 기계적인 이해의 방식으로 책은 읽힌다. 이제 독서는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달음질하는 경주가 된다. 종착지에서 서둘렀다는 아쉬움이 일어나지만 되돌이키지는 않는다.
이렇게 모든 것은 빨라지고 매일매일을 '시간 없이' 살고 있다.
법정 스님의 <산방한담>에 나오는 이야기다.
사람을 피해 한평생을 깊은 산속에 숨어 살았던 9세기의 선승 법상의 자취가 남의 일 같지 않게 여겨진다. 그는 자기 스승 마조선사에게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마음이 곧 부처니라'는 말을 듣고 크게 깨닫는다.
지혜의 눈이 열린 그는 이제 더 스승 곁에 있을 필요가 없어 그 길로 대매산이라는 깊은 산에 들어가 초암을 짓고 홀로 살면서 좌선을 한다. 그는 잣나무 열매를 따먹고 연못에서 자란 연잎으로 옷을 엮어 입었다. 좌선을 할 때는 여덟 치 높이의 쇠로 만든 탑을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산문 밖 세월이 3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한 스님이 그 산에 들어가 지팡이감을 찾아다니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끝에 그 초암에 이른다. 더벅머리에 풀옷을 걸친 은자를 보고 그는 묻는다.
"스님께서는 이 산에 들어와 산 지 몇 해나 되셨습니까?"
"둘레의 산이 푸르렀다가 누우래 졌다 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네."
'산중무일력', 깊은 산속에 달력이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수행승은 과거나 미래에 살지 않고 항상 현재를 최대한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흘러가는 시간에는 관심이 없다.
'무일력', '없는 시간'을 살고 싶다. 과거에 밀쳐지고 미래에 끌려가며 현재를 최대한으로 살지 못하는 삶은 슬프다. 사람은 언제부터 시간 속에 살게 되었을까? 먼 옛날에는 사계절과 달의 차고 기움과 밤낮 정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 후에 아침, 점심, 저녁이 생기고, 최근 몇 백 년 전에는 자시니 축시니 지금보다 성긴 시간 속에 살았을 것이다. 이제는 하루를 열두 시간으로 쪼개고 그것도 잘게 부수어 분, 초, 그 이하를 다투고 있다.
요즘 심신을 치유하기 위해 디지털 기기 사용을 중단하는 '디지털디톡스'나 형식적이고 표면적인 인간관계를 중단하는 '관계 정리하기'가 유행이지만 정말 근원적으로 필요한 것은 '타임 디톡스'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