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삼성전자에서 일하던 중 백혈병을 얻은 황유미 씨가 사망했다. 이 죽음을 계기로 삼성전자와 관련한 직업병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단체인 반올림이 결성됐다. 반올림은 삼성전자에서 발생한 직업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업재해 신청, 법률 소송, 노숙 투쟁, 조정 및 중재절차 참여 등을 포함하는 치열한 투쟁을 10년 이상 이끌어 왔다. 반올림의 치열한 노력 끝에 삼성 백혈병 사건은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분쟁의 주요 당사자가 중재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합의했고, 그에 따른 중재판정이 2018년에 내려졌기 때문이다. 반올림 또한 2017년, 자신들의 활동 10년을 평가하고 향후 과제를 도출하면서 삼성 백혈병 사건은 종결된(될) 것임을 암시하였다. 이렇게 일견 종결된 듯이 보이는 이 사건을 '인권경영'의 관점에서, 좀 더 국제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에서 한 번 더 살펴보아 미처 착안하지 못했던 부분을 드러내 보고자 한다.
먼저, 삼성 백혈병 사건의 논란 지점을 살펴보자. 두 분쟁 당사자 중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어렵지만, 적어도 논란 지점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있다.
1)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수많은 백혈병 및 기타 질병이 발생했다.
2020년까지 120건의 산재 신청이 있었으며 56건이 산재로 인정받았다. 이 중 소송을 통해서 인정된 것은 19건이었다. 이는 결코 적지 않은 수이다. 하지만 삼성은 자신의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2) 삼성은 독성물질에 대한 관리가 부실했다.
2011년 관계 부처의 발표 자료를 보면, 삼성은 이때까지 취급 물질의 성분조사를 자체적으로 한 적이 없고 취급 물질의 71퍼센트에 대해서는 노출평가를 한 적이 없다. 삼성은 안전장치를 수시로 해제하고 작업하도록 했으며, 누출사고가 수시로 일어나 많을 때는 한 달에 두세 차례 발생했다고 피해자들은 불만을 제기했다.
3) 삼성은 작업장의 독성물질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
산업안전보건법은 각 공장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을 '물질안전보건자료'에 기록해 노동자들에게 공개하도록 하고 있으나, 삼성은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2008년 노동부의 시정명령을 받았다. 삼성이 사용한 독성물질에 관한 정보 중 많은 것이 삼성 이외의 사람에 의해 공개됐다.
4) 삼성은 피해자의 산재 신청을 적극적으로 막았다.
삼성은 민형사*행정 소송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위로금을 주는 희망퇴직을 권했다. 투병 중인 노동자와 유가족을 대상으로 산재 신청을 포기하라고 설득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삼성은 산재 소송에 보조참가자로 참가하여 산재를 부인하기도 했다.
5) 삼성은 피해자가 노동조합과 반올림의 도움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피해자들은 삼성이 개별적으로 접촉하여 화해를 시도하면서 민주노총이나 반올림과의 단절을 전제조건으로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삼성 미래전략실 '백혈병 대책 회의' 문건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다수 나왔다.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피해자들과 반올림을 분리하려는 불온한 시도가 많았다.
6) 삼성은 산업재해를 부정하는 여론전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삼성은 보도자료를 통해서 반도체산업의 안전성을 주장했고, 2016년 외신기자 간담회에서도 삼성은 안전설비 면에서 최고이므로 산재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위와 같은 논란 속에 피해자의 주장이든 삼성의 주장이든 결정적으로 증명하거나 반박하기 힘든 교착 상태가 4~5년간 계속됐다. 이 교착 상태를 해소한 것은 삼성 백혈병 사건을 둘러싼 여론의 변화였다.
시간이 갈수록 삼성에 불리한 국면이 전개됐다. 근로복지공단과 법원을 통한 산재 인정 건수가 늘어났고,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수도 급격히 늘었다. 해외에서도 삼성 반도체 사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해외 투자자들은 삼성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이 지경에 이르러 삼성은 문제 해결에 나서기 시작했다.
2012년 11월에 삼성은 대화를 제안했다. 가족대책위와 조정을 통한 문제 해결을 추진했다. 조정 의제는 사과, 보상, 재발방지대책으로 하기로 하고, 2014년 12월 조정절차가 개시됐다. 오랜 조정 과정을 거쳤지만, 2015년 7월 조정위원회는 조정안에 대한 합의를 성사시키지 못했고, '조정권고안'을 발표했다. 조정권고안의 내용은 첫째, 보상과 관련하여 보상 대상자와 보상액, 청구권 행사 여부와 보상 실무 수행 방안, 보상금 출연과 공익법인을 통한 운영 계획을 담았다. 둘째, 재발방지대책으로 내부 재해 관리 시스템 강화와 외부의 확인 점검 시스템 구축을 위해 삼성은 건강연구소, 건강지킴이센터를 개설하고 옴부즈맨 시스템 수용을 권고받았다. 셋째, 사과에 관해 삼성은 노동건강인권선언을 하고 아울러 사과를 하도록 했다. 사과는 위험에 대한 관리 부실 인정과 해결 노력 부족, 이로 인한 고통의 연장 유발에 대해 기자회견과 개별적 서신을 발송하는 것으로 했다.
이 조정안은 실행되지 못했다. 삼성은 조정절차를 보류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조정안과 무관하게 자체적인 보상과 사과 절차를 실행했다. 삼성은 공익법인을 통한 운영을 거부하고 자금 집행 과정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사과는 공개 사과 대신에 비공개의 개별적 사과로 대체하고 삼성의 산재 책임을 시인하는 내용을 담지 않았다. 삼성은 조정안을 거부함으로써 사과의 수위를 낮추고 보상 절차를 독점함으로써 삼성 백혈병 사건의 의미를 경제적 보상 문제로 축소시켰다. 이제 남은 선택은 삼성이 주는 돈을 받고 끝낼 것인지, 산재 인정과 사과를 얻어 내기 위해 더 싸울 것인지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조정안의 일방적 파기는 피해자의 굴욕을 요구하는 잔인한 결정이었다.
이런 삼성의 배신에도 일부 피해자와 반올림은 2015년 10월 7일부터 삼성전자 강남 사옥 근처에서 이후 1,000여 일에 걸친 대장정의 노숙농성을 시작했다.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고립되고 지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일어난 사회적*정치적 격변이 이들을 되살리는 계기가 됐다. 국정농단 촛불시위가 대대적으로 커지면서 기득권과 삼성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게 된 것이다. 결국 2018년 삼성은 반올림에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양 당사자가 문제 해결 방식을 변경했다. 즉, 양 당사자는 조정위원회의 중재판정에 따르기로 합의한 것이다. 삼성은 신속하게 분쟁을 해결하고 싶어했고 반올림은 조정 파기의 경험 때문에 중재를 선호한 듯했다. 이렇게 해서 중재절차가 진행됐고 2018년 12월 중재판정이 내려졌다. 중재판정은 당초 조정안에 비해 몇 가지가 바뀌었다. 보상에 있어, 운영을 위해 지원보상위원회를 두는 것으로 했다. 사과에 있어서는 조정안과 거의 같았다. 재발 방지에서는 산재 방지를 위한 표준지침 개발 등의 노력을 해야 하고, 산학 협력과 연구개발 투자 확대 등 사회공헌 내용을 보강했다.
양 당사자는 중재판정을 받기로 합의했고 그에 입각하여 중재판정이 내려졌으니 분쟁은 일단락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해결이 과연 이 사건의 종지부일 수 있으며 환영받을 만한 해법인지에 대해서 적지 않은 의문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첫째, '보상'의 의미는 무엇인가? 금전의 성격은 '배상'인가 '보상'인가? 중재위원회는 '지원보상'이라고 했다. 달리 표현하면 이 금전은 결코 삼성의 잘못에 근거한 '배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삼성은 결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재판정은 제3자의 명령으로 중재판정서에 적혀 있는 사과문을 읽는 것은 중재판정을 실행하는 것일 뿐 고백이라는 의미의 사과는 아니다. 셋째, 재발방지와 관련하여 어떤 문제의 재발을 방지하려는지조차 명료하지 않아 삼성의 노력을 신뢰할 수 있을지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반면, 삼성은 많은 것을 얻었다. 노숙 투쟁 중지와 추가적인 요구 금지, 삼성 백혈병 사건의 최종적 종결을 얻었다. 옴부즈맨 제도를 폐기하여 외부 감시를 배제했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은 채 문제를 종결시켰다.
10년 이상의 치열한 과정을 겪은 삼성 백혈병 사건을 이렇게 종결하는 것은 뭔가 미진하다. 국제인권규범으로 어떤 대안이 가능한지 살펴보자. 도움을 줄 수 있는 국제인권규범으로 '독성물질 노출로부터 노동자 보호 및 인권에 관한 원칙'(이하 '독성물질원칙')이 있다. 독성물질원칙은 그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노동자가 독성물질에 노출됨으로써 생기는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룬 문서이다(관련 글 참조).
독성물질원칙이 삼성 백혈병 사건에 대해서 갖는 함의는 이 사건을 인권침해 사건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많은 노동자들이 삼성의 작업장에서 독성물질에의 노출로 인해서 생명 및 신체의 손상을 입었다. 71명의 산재 인정만으로도 인권침해 사건으로 취급하기에 충분하다. 삼성의 노동자들이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조건의 권리를 침해당했으며 생명권, 건강권 및 신체의 완전성에 대한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봐야 한다. 그 외에도 독성물질에 대한 정보가 신속하게 전달되지 않은 것, 알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은 점, 독성물질에 관한 정보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점, 노동권이 보장되지 않은 점 등도 모두 인권 이슈이다.
독성물질원칙에 근거하여 사건을 보면, 우선, 반올림과 피해자들의 투쟁은 정당했다. 삼성 반도체 사건을 인권 문제로 성격 규정했더라면 삼성을 더 강하게 압박하고, 유엔 등 국제인권기구의 도움과 국제사회의 연대를 확보하기 쉬웠을 것이다. 독성물질원칙은 피해자와 반올림에게 대한민국 정부와 삼성을 상대로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이디어와 힘을 준다.
삼성에 대해 독성물질원칙은 독성물질에 노출되지 않을 권리, 즉 건강하고 안전한 노동조건에의 권리를 노동자의 인권으로서 인정하고 존중하라고 요구한다. 삼성은 노동자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사전예방조치로서 실사를 실시해야 한다. 또한, 노동자의 알권리 보장 차원에서 독성물질에 관한 정보를 세밀하게 분류하여 수집하고 관리하고 노동자에게 제공해야 한다. 노동권의 보장과 피해자의 구제 활동도 해야 한다. 이런 모든 것은 삼성이 갖는 인권 존중 책임의 실천이지 결코 시혜적 활동이 아니다.
국가에 대해 독성물질원칙은 정부에게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한다. 국제인권법상 정부에 부과된 법적 의무임을 상기시킨다. 정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노동자들이 독성물질에 노출되지 않도록 사전적*사후적으로 조치해야 한다. 첫째, 정부는 노동자의 자력화를 도와야 한다. 구제절차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도록 입증책임 전환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둘째, 기업이 독성물질 실사를 하도록 정책을 펼쳐야 한다. 인권실사의 법적 의무화를 적극 검토해야 한다. 셋째, 기업활동에서 독성물질이 노동자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스스로 적극적인 규제 정책을 펼쳐야 한다. 감시 활동과 부실한 관리가 적발되는 경우 형사처벌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결국 독성물질원칙은 삼성에게 변화를 호소하고 동시에 삼성이 변신하도록 외부에서 압박하는 방식으로 독성물질로 인한 산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라도 중재판정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독성물질원칙을 지침 삼아 삼성(기업)과 국가 그리고 노동자(피해자)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
<인권경영, 세상을 바꾸는 패러다임>에서 발췌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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