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의 공식 통계에 의하면 2018년도 국민연금의 사회책임투자는 불과 4.18퍼센트에 그친다. 유럽 48.8퍼센트, 미국 25.7퍼센트, 캐나다 50.6퍼센트, 일본 18.3퍼센트에 비해 지극히 적은 수준이다. 국민연금의 이러한 사회책임투자 정책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사건이 2019년 3월 27일에 벌어졌다. 국민연금이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행사한 것이다. 대한항공의 2대 주주(지분율 11.56퍼센트)인 국민연금은 대한항공의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의 연임에 반대함으로써 한진그룹 총수를 핵심 계열사의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엄청난 변화에 대해 일부 언론은 '불법 비리 등 일탈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으로서 당연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한국경영자총협회 및 일부 언론은 이를 연금사회주의의 징후로 해석했다. 이런 양 극단화된 비평 중 어느 것이 적절한 것일까? 사회책임투자의 명분으로 경영자의 퇴출을 위한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
사회책임투자는 환경, 사회, 지배구조(이하 'ESG')를 고려한 투자 활동을 의미하는데, 국민연금은 더욱 엄정하게 ESG를 고려해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 국민연금은 수많은 국민의 미래를 책임지므로 안정성이 특히 중요하다. 국민연금은 ESG 리스크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재무적 리스크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둘째, 국민연금기금의 거대한 규모를 고려했을 때, 국민연금의 운영에는 보편적 투자와 장기적 투자가 불가피하다. 국민연금은 손쉽게 투자처를 옮겨 다니는 전략을 취할 수 없다. 셋째, 국민연금은 그 규모가 방대한 만큼 사회의 ESG에 미치는 영향력도 크다. ESG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투자하라는 사회적 압력을 받는다. 이러한 당위성에 따라 국민연금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회책임투자를 검토하고 준비했다.
국민연금은 2009년 유엔 사회투자원칙(Principles for Responsible Investment, UN PRI)을 준수하겠다고 서명했다. 유엔 사회투자원칙이 말하는 책임투자는 ESG 이슈들을 투자 의사 결정 시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둘째, 2015년 국민연금법의 개정을 통해서 사회책임투자를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국민연금법 제102조는 '기금을 관리 운용하는 경우에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수익 증대를 위하여 투자 대상과 관련한 ESG 등의 요소를 고려할 수 있다'라고 규정했다. 셋째, 2018년 국민연금은 투명성 및 독립성 강화, 기금의 장기 수익률을 제고하기 위한 스튜어드십 코드로 '수탁자책임에 관한 원칙'을 도입했다. 이 원칙에서 ESG 등 비재무적 요소를 고려하여 투자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으며, 국민연금이 수탁자로서 의결권 행사를 포함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할 것임을 명시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사회책임투자의 실행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갖추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한항공에 대한 대담한 의결권 행사는 갑질이나 배임, 횡령 등 ESG 이슈가 국민연금의 투자 판단 및 개입 활동에서 주요한 고려 요소로 부각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흐름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국민연금의 4퍼센트 남짓한 사회책임투자 규모를 볼 때 국민연금의 대한항공 지분이 사회책임투자 기금이었는지가 불분명한 것이다. 말하자면 국민연금의 투자자산구성상 사회책임투자 기금에 속하지 않은 투자기금에서 ESG를 고려하여 의결권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만약 그렇다면 국민연금은 어떤 근거로 ESG를 고려한 의결권 행사를 했는가? '사회책임투자'라는 표현이 상황에 따라서 편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생기게 된다.
기관투자자의 사회책임투자에 대한 몇 가지 유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경제주의적 유형이다. 기관투자자가 법을 준수하면서 최선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기관투자자의 사회적 기부나 윤리적 관점에서 투자철회를 결정하는 행위는 재량적인 것으로 그것을 하지 않더라도 비난받지 않는다. 둘째, 최소주의적 유형이다. 합법적이더라도 윤리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행위를 하는 기업에는 투자하지 않는 유형이다. 기관투자자는 ESG를 고려한 장기적 투자를 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자선적 투자 행위는 의무적이라기보다 선택적이다. 셋째, 최대주의적 유형이다. 적극적으로 사회적 가치에 투자하는 유형이다(투자자의 세 가지 유형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은 앞의 글 '사회책임투자와 인권경영'에 있다). 국민연금의 사회책임투자는 어떤 유형일까?
국민연금은 첫 번째 유형의 '경제주의적 사회책임투자'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법 제102조는 재정의 장기적 안정과 수익 최대화가 최우선임을 보여주고 있다. ESG는 장기적 수익 최대화를 위한 고려사항일뿐이다. 또한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에서는 피투자 회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행위를 기금 수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로 한정하고 있다. 국민연금의 기금운영위원장인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도 이와 같은 이해를 보여준다. 2019년 2월 1일 '명백한 위법행위로 국민자산에 손해를 끼치는 경우에만 주주활동을 적극적으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기 수익성 이외 다른 어떤 것도 적극적 주주활동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런데, 국민이 국민연금에 대해서 사회책임투자를 요구한 것은 장기 수익률을 높이라는 요구였던가?
국제사회에서 올바른 사회책임투자에 대한 대안적 접근이 유엔과 OECD를 중심으로 제시되었다. 유엔을 중심으로 추진되는 '인권경영'과 OECD가 주도하는 '사회책임경영'이다. 두 규범은 결과적으로 기관투자자가 투자결정을 할 때 어떻게 ESG를 고려해야 하는지에 대해 같은 내용을 요구하는데, 모두 '최소주의적 사회책임투자'를 얘기하고 있다(좀 더 상세한 설명은 '사회책임투자와 인권경영' 참조). 이렇게 볼 때 국민연금이 이해하는 사회책임투자는 국제사회의 흐름과 일치하지 않는다.
국민연금은 공공기관으로서 인권정책선언을 하고 인권경영체제를 구축했다. 국민연금에게 인권경영이란 투자 활동을 통해 타인의 인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을 포함한다. 국민연금은 인권 존중 책임을 실행하기 위해 사전 예방적인 인권영향평가를 실시하고 부정적 인권영향에 대해 개입활동을 해야 한다. 여기에서 투자철회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사후적인 고충처리장치를 제공해야 한다. 이 모든 활동은 인권경영으로 이루어지는 사실상 사회책임투자 행위이다. 이러한 사회책임투자가 국제사회가 지지하는 최소주의적 사회책임투자 행위이고 국민연금이 현재 추구하는 사회책임투자보다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인권경영을 기반으로 사회책임투자의 원칙이 올바로 정립될 때 국민연금 기금에 대한 정치적 개입의 근거가 제거되고 기금 운용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결론으로 대한항공 총수와 그 일가의 갑질과 위법행위에 대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정당화될 수 있을까? 장기적 수익 극대화를 위한 의결권 행사였는가? 조양호 전 회장 체제하에서 대한항공은 미국의 항공 월간지 선정 '올해 세계 최고 실적 항공사'로 선발된 점을 볼 때 갑질과 위법행위가 장기적 주주가치를 잠식할지 객관화하기 어렵다. 총수의 퇴진에 의결권을 행사한 것은 적어도 경제적 관점에서는 정당화될 수 없다. 다음으로 윤리적 이유로 ESG를 고려하는 개입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 건처럼 최고경영자를 배제하는 것이 적절한 개입이었는지는 의문이다. OECD 기관투자자 지침은 부정적 영향이 발견되면 최대한 대화로 해결하고, 그래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 투자감소와 투자철회를 하고 궁극적으로 투자배제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어떤 국제기준도 경영자를 축출하는 의결권 행사를 권고하지는 않는다. 조양호 회장을 축출한 것은 정당화되기 힘들다. 대한항공의 사업적 성공과 무관하게 총수 일가의 갑질과 불법에 대한 국민적 공분을 배경으로 정치적 개입을 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를 경제전문가로? 우려와 대안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인권경영, 세상을 바꾸는 패러다임>에서 발췌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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