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가능성을 정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간단한 것은 지속 가능한 사회란 여러 세대에 걸쳐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라고 정의한 것이다. 사회 시스템을 지탱하고 있는 물질적, 사회적 기반을 무너뜨리지 않을 만큼 충분히 멀리 내다볼 줄 알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슬기로운 사회를 말한다.
1987년 세계환경개발위원회는 지속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기억에 남을만한 명문장으로 설명했다.
지속 가능한 사회는 '오늘날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미래 세대의 역량을 훼손하지 않고 현재의 욕구에 잘 대응하는' 사회이다.
시스템 공학의 견지에서 보면 지속 가능한 사회는 인구와 자본의 기하급수적 증가를 유발하는 양의 피드백 순환고리들을 끊임없이 점검하기 위해 각종 정보 체계와 사회적, 제도적 기제들을 적절하게 배치한 사회를 말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기술의 변화와 사회의 불요불급한 결정에 따라 인구와 자본이 일정한 수준에서 변화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출생률이 사망률과 거의 일치하고 자본의 투자율이 자본의 상각률과 거의 같은 사회를 뜻한다. 지속 가능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물질적 생활 수준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적절하고 안전하고 공평하게 분배될 수 있도록 인구와 자본, 기술이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져야 한다. 지속 가능한 물질과 에너지 사용을 위해서는 경제의 물질 처리량이 허먼 댈리가 제시한 세 가지 조건들과 일치해야 한다.
* 재생 가능한 자원을 사용하는 속도는 그것을 재생산하는 속도보다 빠르면 안 된다.
*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사용하는 속도는 지속적으로 재생 가능한 대체 자원이 개발되는 속도보다 빠르면 안 된다.
* 오염 물질 방출 속도는 환경의 동화(자정) 능력을 초과하면 안 된다
지속 가능한 생태발자국을 유지하는 사회는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세상일 것이다. 사람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세계에 대한 심성 모형들은 끊임없는 가난이나 급격한 물질적 성장,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성장을 유지하려는 강력한 의지들과 같은 이미지들로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무조건 성장하지 않으면 침체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목적의식을 갖고 풍요롭고 정의로운 지속 가능한 사회를 꿈꾸는 일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지속 가능성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얘기해 보자.
지속 가능성은 반드시 '제로 성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속 가능한 사회는 물질적 성장을 반드시 이루어야 할 지상 명령이 아니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하나의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지속 가능한 사회는, 자연과 사회가 부담해야 할 비용을 모두 따져보았을 때, 거기서 얻을 가치보다도 대가가 클 경우, 그 일이 무엇이든 간에 한계를 초과하지 못하게 하거나 당장 멈추게 하기 위해서 마이너스 성장까지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회를 말한다.
지속 가능한 사회는 현재의 불공평한 분배 형태가 영원히 지속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지속 가능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면 남아 있는 성장 여력은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배분될 것이다.
지속 가능한 상태란 경제 성장이 멈추면 낙담과 침체에 빠지고 실업, 파산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현재와 같은 사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지속 가능한 사회로의 신중한 이전은 모든 사람과 기업들이 새로운 경제 체계 속에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충분히 천천히, 그리고 충분한 사전 조정을 거쳐 진행될 것이다.
지속 가능한 사회가 기술이나 문화 측면에서 현재보다 뒤떨어질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지속 가능한 사회는 인류가 근심과 탐욕에서 벗어나 타고난 창의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지속 가능한 세계는 인구나 생산량 같은 것들이 지나치게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는 융통성 없는 세계가 아니며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지속 가능성을 위한 규칙들은 현재 작동 가능한 모든 사회 규칙이 그런 것처럼 자유를 구속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창조하거나 보호하려는 것이다. 강도가 은행을 터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사용을 신중하게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당연하다.
끝으로 지속 가능한 사회가 획일적이어야 하는 까닭도 없다. 문화적 다양성, 자율성, 자유, 자결권은 지속 가능한 세계에서 더 커질 것이다. 지속 가능한 사회가 비민주적이거나 따분하거나 활력이 없어야 할 까닭도 없다. 그러나 거기에도 여전히 경쟁과 도전, 풀어야 할 문제들이 있을 것이고, 또한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서로를 섬기고, 자신들의 능력을 시험하고, 좋은 삶을 사는, 아마도 현재의 어느 것보다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여러 가지 방식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장을 지상 과제로 생각하는 많은 문화들 아래 잠재해 있는 가난, 실업, 영원히 채울 수 없는 인간의 욕구들과 같은 현재의 문제들을 올바로 인식할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사회를 향해서 중요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현재와 같이 구조화된 성장은 이러한 문제들을 다만 서서히 그리고 비효율적으로 풀어갈 뿐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나 현재의 인간 사회는 더욱 효과적인 해법들이 시야에 잡히기 전까지는 사회 구성원들이 성장을 너무도 간절히 바라는 탓에 성장 중독증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성장은 거짓 희망일 수도 있지만 전혀 희망이 없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 성장의 한계 >에서 발췌요약
* 다른 것들도 그렇지만 지속 가능한 사회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없다. 우리는 멋대로 가고 있다. 미래세대를 고려한 정의에 대한 무지가 그렇고 총론 없이 탄소나 에너지 등 경제에 국한된 시각이 그렇다.
* '성장' 또는 '자유'와 관련하여 존 스튜어트 밀을 왜곡하지 말자.
경제가 지구의 한계를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진지하게 생각한 최초이자 마지막 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자신이 '정상 상태'라고 부른 것이 사회의 발전과 향상을 지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175년 전에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 보수적인 정치경제학자들이 자본과 부의 정상 상태에 대해서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내놓고 혐오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이 전반적으로 우리의 현재 상황을 매우 크게 개선할 것이라고 믿고 싶다. 고백건대 인간은 언제나 투쟁 속에 사는 것이 정상이라고, 즉 서로 짓밟고 뭉개고 밀어 제치고 뒤쫓는 것이 인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생관에 솔직히 동의하지 않는다.... 자본과 인구의 정상 상태가 반드시 인류 발전의 정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굳이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거기에는 모든 인간의 정신문화와 윤리,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기회들이 무수히 많이 있다. 즉, 그러한 정상 상태는 삶의 방식을 개선할 여지가 많으며 그것을 발전시킬 가능성이 다른 어떤 상태보다 훨씬 더 높다."(같은 책에서 인용)
“지속 가능한 성장은 ‘환상’…우선 다양한 대안 얘기하는 것이 첫걸음”[인터뷰 전문] - 경향신문 (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