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알이 2022. 9. 12. 22:12

  어느 사회나 젠더(gender), 성별 제도를 남녀 간 문제나 가정, 결혼, 연애 문제로 국한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젠더를 '여성문제'로만 인식하게 되면, 성별은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가 아니라 사회의 한 분야로 간주되고, 젠더(문제)는 사회 문제 중의 하나이거나 우연히 발생한 부수적 피해 내지 부산물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다.

  젠더는 한 사회의 구조, 시스템, 규범, 법, 정책, 제도, 이데올로기, 문화, 물적 토대다. 성별 분업 없이, 여성 노동 없이는 사회는 단 한순간도 움직이지 않는다. 동시에 젠더는 계급 차별과 인종주의를 작동시키는 가장 중요한 기제다. 젠더는 계급처럼 사회와 인간을 형성하는 가장 강력한 재료 중 하나며, 사회 문제를 재구성하고 재창조하는 가장 힘 있는 조물주다. 기존 사회는 이런 인식에 무지하고, 인식한다고 해도 최대한 그 영향력을 외면하려고 한다. 젠더를 남녀 간 갈등이 아니라 여성(소수자, 타자...)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사회 구성 원리나 재창조 원칙으로 인식한다면 젠더는 이슈나 소재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이 된다.

  젠더를 인식론으로 접근하면, 젠더는 '여성 문제(question)'가 아니라 '남성 문제(problem)'가 될 것이다. 이제까지 백인 남성이 써온 모든 역사는 학습과 숭배가 아니라 비판과 문제제기의 대상이 될 것이다. 모든 주류의 상징으로서 '남성'은 인식 주체에서 인식 대상으로 강등되고, 그들의 경험과 언어는 기원, 본질, 보편자의 지위를 잃고 특수화, 사소화, 타자화될 것이다. 젠더(성별) 문제는 사적인 문제이거나 하찮은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모순이다. 그래서 젠더 문제는 당연히 이해관계, 권력관계의 충돌이다. 남성 권력은 분명, 여성을 억압하는 '적'이다.
  국민, 노동자, 민중, 시민의 개념은 성 중립적이지 않다. 이들은 모두 남성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여성이 이들 범주에 포함되려면 '여성 노동자'와 같이 기존 개념에 부가적인 명칭을 갖게 된다. 여성의 계급성은 그녀 자신이 가진 물적 기반에 의해 정해지기 보다는, 여성이 맺는 가족 관계, 즉 ('여성을 소유한') 남편이나 아버지의 계급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공적 영역은 남성만을 주체로 세우기 때문에 여성이 공적 영역과 관계를 맺거나 경찰, 법 같은 공적 자원을 이용하려면, 가족제도를 통해 남편을 매개할 때 가능하다.


  '남성 정치인 전성시대'라는 말은 존재하지도 않고, 뉴스가 안 된다는 점에서 '여성 정치인 시대' 자체가 이미 성(차)별적 현상이 아닌가! 또한 '여성 정치인 시대'가 여성운동의 성과임은 분명하지만, 개인의 뛰어남, 집안 배경, 도덕적 상징, 신선한 이미지 활용이라는 면에서 여성의 '진출'이라기보다 남성 문화의 '선택'이라는 점도 배제할 수 없다.
  이제까지 양성평등은 남성이 여성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남성과 같아지는 것을 의미했다. 남성들은 '양성평등'을 위해 여성과 같아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같음의 기준이 남성의 경험에 근거한 것일 때, 여성은 남성과 같음을 주장해도 차별받고 다름을 주장해도 차별받는다. 이것이 소위 '차이와 평등의 딜레마'다.
  극심한 성별 직종분리, 성차별적인 한국의 노동시장 구조 때문에 여성은 서른 중반이 넘어가면 공식적 직업영역에서 거의 사라진다. 그때까지 '버티는' 여성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 남성들은 공적 영역에서 만나는 여성들을 동료로서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전혀 훈련되어있지 않다. 여성과 동료나 경쟁자로 관계 맺어 본 경험이 없는 것이다. 성별분업, 남성들은 주로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사적'인 영역이라고 간주되는 가족이나 연애관계에서 관계성을 경시 혹은 부정함으로써 여성의 육체노동, 감정 노동, 정신노동에 무임승차한다. 관계에서 남성의 '과묵함'이나 모든 면에서 감정적이지 않으려는 심리는 이 때문이다.

  인간을 남성, 여성으로 구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성애제도의 산물인 것이다.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