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매우 어렵다. 문제의 이데올로기가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감추려 들 때는 더더욱 그렇다. 육식주의 이데올로기가 바로 그런 경우에 속한다. 이런 유형의 이데올로기를 ‘폭력적 이데올로기’라고 부르자. 문자 그대로 육체적 폭력을 중심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시스템에서 폭력을 제거한다면-이를 테면 동물 죽이기를 멈춘다면-시스템은 사라질 것이다.
현대의 육식주의는 광범한 폭력 위에 서 있다. 식육산업이 현재의 이윤 폭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동물을 도축하려면 이 같은 수준의 폭력이 불가피하다. 육식주의의 폭력성이 어느 정도인고 하니, 거의 모든 사람이 그 현장을 제 눈으로 보기를 꺼리고, 목격한 사람들은 심한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왜 우리는 동물의 고통을 보기 싫어할까? 감각이 있는 다른 존재와 공감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설사 ‘동물 애호가’가 아닐지라도, 다른 존재가-인간이든 동물이든- 고통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 고통이 지독하고 불필요한 것일 때는 더욱 그렇다.
불과 몇 분 전에 우리가 껴안고 어루만졌던 바로 그런 동물들의 고기를 먹으려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의식조차 하지 않을 만큼 확고하게 육식의 정당성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육식주의 시스템을 떠받쳐 주는 일련의 신화들을 받아들이도록, 또한 우리가 스스로에게 되뇌는 말들이 서로 앞뒤가 안 맞아도 무시하도록 배워 왔다. 폭력적 이데올로기는 허구를 사실로 내세움으로써, 그리고 진실을 드러낼 수 있는 모든 비판적 사고를 방해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이다.
육류에 관한 방대한 신화들이 있지만 그 모두는 (필자가)‘정당화의 3N’이라고 부르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즉, 육류를 먹는 일은 ‘정상이며(normal), 자연스럽고(natural), 필요하다(necessary)’는 것이다. 3N은 아프리카인들의 노예화에서부터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에 이르는 모든 착취 시스템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돼 왔다. 한 이데올로기가 전성기에 있을 때는 이런 신화들이 면밀하게 검토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시스템이 마침내 붕괴하면 그 3N이 말도 안 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예컨대 미국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으면서 내세운 이유를 생각해 보라. 남성만 투표를 하는 것은 “선조들이 정해 놓은”일이며, 여자들이 투표를 하게 되면 “국가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히고 “재앙과 파멸이 온 나라를 덮칠”거라고 하지 않았는 가.
3N은 우리의 사회의식에 아주 깊숙이 뿌리내려, 우리가 그것을 전혀 떠올리지 않아도 그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그게 우리를 대신해 생각하는 셈이다. 우리는 3N을 완전히 내면화하여, 그게 단지 널리 퍼진 견해가 아니라 보편적 진리인 듯이 그 신조에 맞추어 산다. 3N은 고기를 먹을 때 느낄 수도 있는 도덕적 불편함을 완화해 준다. 우리가 저지르는 일에 대해 그럴듯한 변명을 할 수 있도록 해서 그 행위에 대한 죄책감을 덜 느끼게 한다. 3N의 본질적인 임무는 동물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행동에 내재하는 모순을 감추고 우리가 어쩌다 그걸 알아채게 되면 그럴싸하게 해명하고 넘어가는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눈가리개 역할이다.
육류와 관련된 당신의 행동 양식은 말을 배우기도 전에 틀이 잡혀서 평생 그대로 지속돼 왔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행위가 아무런 변화 없이 오랜 세월 반복되는 걸 보면서 우리는 육식주의가 자유의지를 얼마나 무력화하는지를 알게 된다. 우리가 자유로운 주체로 행동할 수 있기 훨씬 전에 형성된 생각과 행동의 패턴은 우리의 정신에 짜여 들어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처럼 선택을 유도한다. 그리고 육류에 대한 우리의 습관적 태도를 무언가 가 교란하면-예컨대 도살 과정을 일부 목격한다 든 지 하면-육식주의의 정교한 방어망이 우리를 재빨리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우리가 시스템 안에 있는 한, 자유의지를 행사하기는 불가능하다. 자유의지는 깨어 있는 의식을 요구하는데, 우리의 뇌리에 깊숙이 배어들어 자리 잡은 사고의 패턴은 무의식적이다. 그것은 의식 바깥에 놓여 있고, 따라서 통제할 수 없다. 시스템 안에 남아 있는 동안에는 육식주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마련이다. 잃어버린 공감 능력을 되찾고, 우리가 느끼고 믿게끔 학습된 것 말고 우리가 진정으로 느끼고 믿는 바를 반영하는 선택을 하려면 우리는 시스템 밖으로 나와야 한다.
<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에서 발췌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