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첫날 밤, 정윤의 비겁한 고백
"마음속으로 경멸하겠지요."
술잔을 내려다보며 처음으로 뇌었다. 소림이 꿈적하고 놀란다. 의외였던 것이다.
"양교리댁 문중에서는 한빈한 무명청년을 경멸했을 테지만 소림 씨는 이 집에 장가온 나를 경멸했을 거요."
소림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진다.
"여러 번 파혼하고....... 어디든 떠나려 했었소. 믿고 안 믿고는 소림 씨 자유겠지만, 네, 자유지요."
"그, 그런데요?"
"고집, 빗발 치듯한 비난과 과장된 화제, 조롱, 그런 것과 싸우는 심정 이겨보려 했지요."
"그럼 싸움에 이기기 위해 저랑 결혼했나요?"
또렷하고 단호한 목소리다. 정윤은 당황하며 소림을 쳐다본다. 눈이 처음으로 마주친다.
"애초엔 무, 물론 그렇지 않았지요. 그럴 이유도 없었고, 양교리댁이나 소림 씨가 다 함께 다시없는 좋은 혼처라 생각했을 뿐이었소. 다만 내 자신이 실수한 일이 있어서 그것만 맘에 걸렸지요. 양교리댁과 소림 씨가 그 일을 알게 되면 안 되는 혼사라구 말입니다."
고통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린다.
"그, 그만둡시다. 얘기한다면 변명밖에 더 되겠소? 나는 오늘 밤 이렇게 신방을 치르고 싶지는 않았소. 이렇게는,"
목소리가 떨렸다. 정윤은 다시 아까처럼 술을 마신다. 별안간 창백했던 얼굴에 피가 모인다.
"나는 내 진실을 희생시키며까지 양소림하고 결혼한 것은 아니오!"
정윤의 어세는 내려갔다. 술잔을 부서져라 꽉 잡는다.
"양교리댁 가풍은 나를 못난 놈으로 만들든지 나쁜 놈으로 만들든지, 다 참아야겠지요, 참아야 할 거요. 내 심정을 귀 기울여 들어줄 사람도 없었지만 내 심정을 나는 전할 수도 없소. 어떻게 설명을 해도 그건 배신자, 출세에 눈이 어두운 놈, 그런 말에 뒷받침해 줄 뿐이니까."
말은 끊었으나 정윤은 마음속으로 외쳐댄다.
'나는 숙희를 사랑한 적이 없었어! 도움을 달라고 간청한 일도 없었고 바라지도 않았다! 가난하고 불우한 나를 감싸주고 격려해주는 마음을 고맙게 생각했다. 숙희의 애정이 애처로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짐스럽고 귀찮을 때가 더 많았다. 명백하게 내 의사를 밝히지 않았던 것은 나빴어. 비겁하고 교활했지. 의전에는 합격이 되었고, 저축한 돈과 원장의 도움만으론 어려웠다. 도저히 해낼 수 없었다! 도둑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어! 그럴 적에 부쳐주는 숙희의 돈을 안 쓸 놈이 어디 있어! 결혼이라는 사슬을 목에 거는 줄 알면서 안 쓸 수가 없었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숙희는 혼기를 놓치고 을씨년스럽게 나만 기다리고, 아아 몸서리쳐지던 그 고통, 양교리댁 혼담은 내게 구원이었다. 구원이었고말고!'
토지 12권 432쪽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