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글쓰기 74

15 서희와 길상의 다툼

길상은 말을 뚝 끊고 고개를 숙인다. 조는가 했더니 자맥질하던 해녀같이 얼굴을 치켜세운다. 몽롱한 취안이다. 씩 웃는다. "최서희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어? 흥, 천하를 주름잡을 텐가? 어림도 없다!" 어조를 싹 바꾸며 반말지거리다. 장승처럼 서 있는 서희 얼굴에 경련이 인다. "넌 일개 계집아이에 지나지 않단 말이야! 거 꿈 하나 거창하지. 아무리 돼지 멱따는 소리 질러봐야 이곳에 구종별배도 없고 으음, 있다면 왜놈의 경찰이 있겠구먼. 흥, 그 새 뼈가지 몸뚱이로 어쩔 텐가? 난 지금이라도 널 희롱할 수 있어. 버릴 수도 있고 흙발로 짓밟을 수도 있고 가는 모가지를 비틀어 죽일 수도 있다 그 말이야. 나 술 안 취했어. 내 핏속엔 술이 아니고오, 음 그렇지 그래. 대역죄인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게야. 아..

14 서로 의지하는 용이와 영팔이의 헤어짐

영팔과 용이 걷는다. "용아." "음." "아무래도 시일이 좀 걸리겠제?" "가봐야 알겄지마는 일찍 오믄 머하겄노. 용정에는 아직 집일이 한창일 기고 품 좀 팔다가 산에 들어갈 시기쯤 해서 오든가." "여기도 품일이야 얼매든지 있지. 웬만하믄 추석은 여기 와서 쇄라." "가봐서." 한참 동안 말없이 걷다가 영팔이 입을 연다. "나는 니가 온다니께 이자는 살 성싶다. 우떡허든지......" "......" "뻬가 빠지는 한이 있어도 돈 모아서 고향 가야제. 맘 겉에서는 빌어묵으서라도 가자......하로에도 몇 분 그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이 험한 고장에 와서 돼지겉이 살믄서 되놈들 종 노릇까지 할라 카니, 지금 생각하믄 그때가 청풍당석이던 기라." "그렇지마는 고향 돌아가는 일이 그리 쉽겄나. 조가 놈이..

2부 2편 꿈 속의 귀마동

자그마한 몸집의 윤이병이 대문께에 서 있다. 송장환을 찾아왔는데 멍청한 모습이다. 강가로 나가더니 한 숨을 쉰다. 누이가 집에서 도망을 와서 돈 마련해 주길 청한다. 윤이병은 거짓말을 했다. 삼 년 전, 예배당에 나가면서 알게 된 애인의 집안이 망하기 시작했다. 아비가 투전에 재미를 붙여 가산을 탕진한 끝에 딸을 술집에 팔아먹은 것이다. 그 후 여자는 어떤 사내가 몸값을 치르고 빼내서 해삼위로 갔는데 여자는 도망을 쳐서 윤이병을 찾아왔었다. 사나흘 후 사내가 들이닥쳐 여자를 앗아갔다. 지금 비슷한 일이 또 생긴 것이다. 그 사내가 바로 김두수요, 여자의 이름은 심금녀. 해는 서쪽 편으로 기울고 김두수는 같은 마차를 타고 가는 나그네와 얘기를 나눈다. 나그네는 왼편 귀 근처로 해서 입술 가까이까지 푸르스름..

13 목수 윤보의 죽음

언제였었던가. 육도천의 시뻘건 흙탕물 위로 숨바꼭질하듯 떠내려가던 바가지 한 짝이 있었지. 숨바꼭질하듯 떠내려가던 바가지 한 짝이 부어오른 송장의 배로 착각이 된다. '이눔우 자석아 송장이 다 돼가는 나를 여기 떠메다 놓고 죽는 마당에 호강을 시키겠다 그 말가? 애라 아서라. 참말로 멋대가리 없는 짓이다.' 죽음 직전의 윤보 목소리다. '니는 모른다. 니는 몰라. 하늘을 쳐다보고 뫼까매귀 소리를 들으믄서, 야 이놈아아야 방구석에서 죽는 것보담, 죽으믄서 계집새끼 치다보믄서 애척을 못 끊는 불쌍한 놈들보다 얼매나 홀가분하노.' '허허 이 사람아. 그만 지껄이게. 죽기는 왜 죽어.' 김훈장이 말을 막았다. 몸에서 피비린내 땀내음이 풍겨왔으나 윤보의 눈은 맑았고 빛이 있었다. '생원님, 입도 흙 속에 들어가믄..

12 길상과 어린 옥이의 첫 대화

그곳은 처마 밑이었는데 계집아이 하나가 벽 쪽에 등을 바싹 붙이고 앉아 있었다. 낙수에 패여 땅이 움푹한 곳에 괴다가 흐르곤 하는 빗물에 연방 생기고 꺼지고 하며 흐름을 따라가는 거품을 계집아이는 손가락 끝으로 지우고, 지우곤 하는 것이다. 귀밑머리를 쫑쫑 땋아 뒷머리와 한 묶음이 된 노르스름한 머리털이 축축이 젖어 있다. 계집아이는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눈을 들다가 어른의 구둣발을 보고 차츰차츰 고개를 치올린다. 뉘한테 야단을 맞았는지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남아 있다. "옥아?" "......." "뭘 하고 있니." "아주방이." "오냐." "어째 내 이름으 알지비?" 길상은 빙그레 웃는다. "옥이는 아주방일 모르겠어?" "응."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눈치다. 하기는 그때 옥이 눈에는 먹을 것 이외..

2부 1편 북극의 풍우

1911년의 오월, 용정촌 대화재는 시가의 건물 절반 이상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용이와 길상이를 포함한 서희 일행은 아직 공사가 진행 중인 절로 피신했다. 일본 통감부 파출소의 협조를 받는 사찰 건립에 서희가 적지 않은 금액을 희사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피난민은 빈터에 막이나 쳐서 추위를 피한다. 양미간에 꼬막살을 잡히고 있는 서희는 길상이를 부른다. 이 부사 댁 서방, 이상현의 소식을 묻는다. 집이 불바다가 됐는데도 찾아오지 않는 상현에게 화가 난 것이다. 길상이는 용정촌에서 손꼽히는 명망가 송병문 댁에 들어 지내는 상현을 찾아간다. 상현은 김훈장과 같이 있다. 전에 상현의 부친 이동진이 군자금을 서희에게 요청하였는데 거절을 당했다. 반면, 서희는 사찰에 희사했고 이를 김훈장은 분해하였고, 상현은 모..

11 월선, 김서방댁과 봉순이의 서로 위로하는 대화

월선의 집에 이른 봉순이는, "아지매요!" 하고 부르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추위에 입술이 굳어져서 목소리가 작았다. 방 안에서 도란도란 씨부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지매요!" "누고오!" "나 봉순이오!" 얼른 방문이 열린다. "아이고오, 봉순이구나. 이 칩운 날에 니가 우짠 일이고. 어서 들어오니라." "봉순이가 왔다고?" 월선이 뒤에서 김서방댁의 거무튀튀한 얼굴이 나타났다. "김서방댁!" 방 안으로 들어선 봉순이는 그만 울음을 터뜨린다. "와 이라노. 봉순아." 월선이는 딱해하며 봉순이 등을 두드리고 김서방 댁은 입을 비죽비죽하다가 함께 따라서 눈물을 흘린다. 자기도 울면서 우지 마라, 하며 때 묻은 치맛자락을 걷어 눈물을 닦는다. 김서방 댁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김서방댁은 우찌 사요." 겨..

10 김개주와 김환, 부자의 대화

언제였던지, 부친이 몸져누운 일이 있었다. 환이는 밤을 새워 부친의 시중을 들었다. 모두가 다 잠들었을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이었다. "환아." "예, 아버님." "너 대장부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촛불에 그늘진 얼굴을 환이 쪽으로 돌리며 느닷없이 물었다. "아버님 같은 분을 대장부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대장부라는 것은 허욕이니라." "예?" "나도 내 자신을 만백성 구하려고 창칼을 들고 나선 사내, 그런 사내 중의 한 사람이거니 자부하고 싶다. 때론 그렇게 믿기도 하고."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아버님을 우러러보고 있는지 그것을 모르시어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환이는 진심에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직 어린 네가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러나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리지 ..